겪어 본 사람은 고통 이해한다지만
시간 지나고 보면 그저 술안주거리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하는 게 더 중요
풍치가 생겨 쩔쩔맸더니 주변에서 인간의 3대 고통이 있는데 출산, 치통, 담석으로 인한 통증이라고 했다. 위로의 말이라 고맙게 들었지만 고통에도 순위가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10여년 전 담석 수술을 받았으니 남자로서 할 수 없는 출산 빼고 겪을 수 있는 고통을 본의 아니게 모두 겪어본 셈이다.
어느 날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몸이 폭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큰 손이 온몸을 쥐어짜는 것 같기도 했다. 119에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불과 50㎝도 떨어지지 않은 전화기에 손을 뻗을 수 조차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 다음 맑은 해가 불쑥 나오듯 그토록 강한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지기까지 겨우 몇 초의 시간이 걸린 듯하다. 담석이라고 진단한 의사가 수술을 권하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 운전하다 또는 지하철에서라도 통증이 다시 오는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일주일 만에 깨어난 적도 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인데 승용차 뒷자리에서 자다가 사고가 났기에 사실 사고의 고통은 조금도 없었다. 푹 자다 깨어난 것 같은데 온몸이 꽁꽁 묶여져 있었고 얼굴도 굵은 실과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어떤 몰골인지 얼굴을 보고 싶은 데 거울을 주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퇴원이 가까워오자 이젠 재활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활치료를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천정에 매달아 놓은 나의 오른 발을 푸는 일이었다. 정강이뼈에 구멍을 뚫어 금속 파이프를 관통시킨 후 끈으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 놓았는데 금속 파이프가 뼈와 붙어 버렸다. 장정 4명이 달려들어 병상에 드러누운 나의 좌우에서 힘을 쓰며 밀고 당기는데 도무지 빠지질 않았다. 한참 뒤 마침내 금속 파이프가 뼈를 스치며 빠져 나가는 날카로운 촉감이란 말로 표현 못하겠다.
그 보다 몇 해 전 강원도 산골 어느 부대에서의 기억도 있다. 부대 취사장 뒤쪽에 집합했을 때의 일이다. 풀 스윙 한 쇠몽둥이에 명치를 맞아 숨이 막혀 뒤로 넘어갔는데 마침 뒤쪽에 돌멩이가 있었나 보다. 돌멩이에 머리를 부딪혀 잠시 기절했는데 누군가 흔들어 눈을 떠보니 기다란 풀이 보이는 가운데 내가 누워 있었다. 대학시절 술만 먹으면 버스 종점까지 가서 풀숲에서 자다 버스회사 사람들이 깨우면 집으로 오곤 했는데, 그때인 줄 착각하고 “아저씨 깨워줘서 고마워요” 했다가 한심한 녀석이라고 몇 대 더 맞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쇠몽둥이로 맞은 아픔보다 아직도 군대구나 하는 생각에 억울했는데 뒤통수에서 뭔가 뜨끈한 것이 흘렀다. 귀찮은 표정의 위생병이 연신 하품하며 얼마나 대강 꿰맸는지 한동안 상처 부위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는데 지금은 만져도 티가 나지 않으니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밝고 즐거운 얘기도 많은데 이런 너저분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흔히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 고통 받은 사람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경험은 그저 지나간 일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일들이 당시에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몸서리쳐지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술안주거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만 봐도 그렇다. 우리네 부모세대 또 부모세대의 부모세대가 겪은 경험을 듣다 보면 어떻게 그 시절을 살아왔는지 경탄스러울 때가 많다. 다만 그런 경험을 해서 주변과 사회를 보는 시야가 너그러워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커졌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가 어려운 삶을 살며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해체된 가정과 가족 간의 갈등이 있는가 말이다. 어릴 적의 어려웠던 경험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며 과시하는 인사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고통이나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랑과 이해로 승화시킬 사유와 성찰이 필요함을 실감한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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