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아동문학 개념 우리나라보다 폭넓어… 실험적 시도 높은 점수
어른 시각으로 어린이 취향 지레 짐작… 다양한 경험 막는 듯
고요하다. 정적은 관 속, 혹은 어머니 뱃속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 같은 적요 속에서 흑백의 소녀가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분투한다. 문 앞에 선 소녀의 뒤에서 또 하나의 자아가 그를 불러 세운다.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정유미 작가의 그림책 ‘나의 작은 인형 상자’(컬처플랫폼) 내용의 일부다. 정씨는 이 책으로 올해 세계 최고 권위의 그림책 상인 볼로냐아동도서전 라가치상 픽션부문 스페셜 멘션(우수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먼지 아이’로 뉴호라이즌 부문 대상을 받은 것에 이어 2년 연속 수상이다. 그림책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에서 대상을 받은 것도, 2년 연속 수상도, 한국작가로선 정씨가 처음이다. 영어로 먼저 나온 ‘나의 작은…’의 한국어판 출간을 며칠 앞둔 9일 연희동 작업실에서 작가를 만났다.
“지난해 ‘먼지 아이’ 수상 때는 정말 많이 놀랐어요. 제가 아니라 스페인 출판사에서 출품한 건데 덜컥 대상을 받았다고 알려왔거든요. 무엇보다 저는 그 책이 아동 도서로 분류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정씨는 아동 그림책 작가가 아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 연출을 공부한 뒤 애니메이션 작가로 활동해 왔다. 수상한 두 작품 모두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그림책으로 변환한 것으로, ‘나의 작은…’은 2006년, ‘먼지 아이’는 2009년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이 원전이다.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보니 흔히 보는 어린이책과는 내용이나 분위기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다. 주인공들은 숨 막힐 듯 정적인 공간 안에서 불안해하거나 사색에 잠긴다. 그림은 아름답지만 때론 공포스런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박찬욱 감독은 단편영화제 심사에서 ‘먼지 아이’ 영상을 본 뒤 영화 ‘박쥐’ DVD의 특별부록으로 수록했다.
“마냥 밝고 예쁜 이야기들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보단 인생의 시기마다 겪게 되는 내면의 갈등,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작게나마 얻게 된 통찰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미지도 한 가지 요소만 가진 것보다 귀여운데 이상하고 예쁜데 기괴한 것들에 더 끌려요.”
‘나의 작은…’은 한 소녀가 직접 만든 작은 인형 상자 안을 여행하면서 4명의 또 다른 자신과 대면하며 성숙해가는 이야기다. 먼지처럼 사소한 갈등,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얕은 봉우리를 힘들게 기어오르는 작은 인물들을 작가는 애틋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 애틋함과 인내는 연필 세밀화 75점으로 표현됐다. 심사위원들은 “사진처럼 섬세하게 묘사된 그림이 독자를 심리적 세계로 데려간다”며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적 내러티브 구조가 심리적 무의식의 미로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밝고 맑고 귀여운’ 국내 아동문학 정서에서 완전히 비껴난 작품이 해외 유수의 상을 수상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씨는 지난해 ‘먼지 아이’ 수상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했다가 아동문학에 대한 인식 차를 실감하고 돌아왔다.
“아동문학에 대한 개념의 폭이 굉장히 넓더라고요. 엄마들이 좋아할 책뿐 아니라 조금은 실험적인 책들, 아동문학에서의 새로운 시도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 같았어요.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어린이의 취향을 지레 짐작해 다양한 경험을 막는 경우가 많은 듯 해요. 저 역시 조카에게 자꾸 예쁜 것만 사주려고 하는데,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른들이 손에 쥐어준 게 시시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생생하거든요(웃음).”
정씨는 3월 말 시상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간다. 이후에는 애니메이션과 그림책 작업을 병행할 계획이다. “지금처럼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계속할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초연령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어린이들이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어른이 된 우리가 다 잊어버린 것 아닐까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사진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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