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에 쭈글쭈글 할머니들 유명 브랜드 모델로 연이어 발탁
구매력 있는 노년층 여성보다 늙음 두려워 하는 젊은층 겨냥
올 봄 패션 브랜드 셀린은 81세의 미국 작가 조앤 디디온을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디디온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불리는 영향력 있는 작가다. 사진 속에서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에 심플한 선글라스를 끼고 입술을 꽉 다문 디디온은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풋풋한 모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삶과 죽음을 몇 차례나 겪은듯한 여작가의 중후함은 화려하게만 보이는 패션 브랜드에 말할 수 없는 무게를 더한다.
젊음보다 늙음에 집중한 것은 셀린뿐만이 아니다. 돌체앤가바나는 올 봄 유수의 모델들을 마다하고 무명의 할머니 세 명을 브랜드의 얼굴로 내세웠다. 피나는 노력으로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데 성공한 ‘동안 할머니’들이 아니라 살가죽이 뼈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을 정도로 탄력을 잃은 진짜 할머니들이다. 생로랑은 올해 72세인 캐나다의 포크록 가수 조니 미첼을 모델로 기용했고, 케이트 스페이드는 94세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아이리스 아펠을 택했다.
패션계는 육신의 노화에 엄격하다. ‘패완얼’(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시쳇말에서도 알 수 있듯 싱싱한 얼굴과 몸은 패션의 처음이자 끝이다. 올 봄 다수의 패션 브랜드들이 노년의 모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일부 외신들은 경제적 분석을 시도했다. 구매력 있는 노년층 여성들이 패션계의 주요 고객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멋진 할머니들을 모델로 기용했다는 것이다.
일견 명쾌해 보이지만 찜찜하다. 일부러 타깃 연령층을 낮춰 부르는 것은 패션 브랜드들의 오랜 관행이다. 고객의 실제 연령대가 70대라면 40~50대를 위한 옷이라고 광고하고, 고객들은 옷과 함께 젊은 패션도 소화할 수 있다는 기분을 소비한다. 일부 브랜드가 77사이즈 옷을 66사이즈로 표기해 기분 좋은 착각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그러니 할머니 모델 열풍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맞겠다. 뉴욕의 멋쟁이 할머니들을 촬영하는 패션 블로거 아리 세스 코헨은 ‘늙음 마케팅’이 오히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는 젊은 여성들로부터 매일 수백 통의 이 메일을 받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더 이상 늙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해요. 한 여성은 제 블로그에서 매일 필라테스를 하는 103세의 할머니를 보고 자극을 받아 54파운드(약 24㎏)를 감량했다고 하더군요.”
코헨이 2008년부터 운영하는‘어드밴스드 스타일’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니어 패션 블로그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민감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보고 자란 그는 뉴욕의 거리에서 만난 은발의 패셔니스타들을 사진기에 담아왔다. 지난해 10월 국내 출간된 코헨의 사진 에세이 ‘어드밴스드 스타일’(윌북)에 실린 할머니들의 절도 있고 과감한 패션은 어린 것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관록을 뿜어낸다. 한 할머니는 하얗게 센 머리를 깨끗이 빗어 넘긴 뒤 사각형 뿔테 안경에 감색 트렌치 코트를 걸쳐 흐트러짐 없는 스타일을 완성했고, 다른 할머니는 자신의 붉은색 머리로 긴 속눈썹을 만들어 붙여 물랑루즈의 주인공 같은 화려함을 연출했다. 원색 패션으로 무장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커플도 눈에 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리지 않는다는 것. 백발과 검버섯, 쭈글쭈글한 피부는 감춰야 할 오점이 아니라 ‘조금 다른 재료’다. 이들은 지점토를 앞에 둔 예술가처럼 노화한 육체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때로는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기분을 고양하기 위해 옷을 입는다.
할머니들의 당당한 자태에 용기를 얻는 것은 또래의 할머니들뿐이 아니다. 급격히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절망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이 할머니들은 시답잖은 위로의 말보다 훨씬 강력하고 구체적인 희망이다. 은발의 패셔니스타들은 늙음을 우스개로 삼는 시대를 향해 선포한다. 삶도, 아름다움도, 끝났다고 말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인터뷰] 거리의 패셔니스타 찍는 아리 세스 코헨
시니어 패션계에서 코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의 블로그에 단골로 등장하는 84세 재클린 타야 머독과 64세 치포라 살라몬은 패션 브랜드 랑방의 광고 모델로 발탁됐고, 다른 할머니들은 동명의 다큐멘터리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코헨에게 거리에서 은발의 패셔니스타를 만나는 일에 대해 물었다.
-늘씬한 허리 대신 굽은 허리의 패셔니스타들을 주목하는 당신의 취향은 특이하다. 노년만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어렸을 때부터 나이든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나의 두 할머니는 이야기 보따리였고, 할머니들의 집은 오래된 보물 창고나 다름 없었다. 할머니들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가르쳤다. 스타일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갖춰야 할 자신감과 품위, 자유로움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을 전세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어떤 기준으로 피사체를 선정하나. 화려하게 입은 노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카메라에 담진 않을 것 같다.
“나만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촬영할 때가 많다. 훌륭한 터번이 영감의 원천이 될 때도 있고 아름다운 진주 다발이나 멋진 정장에 이끌릴 때도 있다. 주로 자기만의 뚜렷한 스타일을 지닌 인물들을 찾아 다니는데,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늘 나를 매혹시킨다.”
-촬영에 즐겁게 응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힘든 일도 있을 것 같다. 스트리트 패션 촬영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정말 힘들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느낀 점을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전부 바쁘고 80~90세 노인들이 하이힐을 신고 뛰어가는 경우도 있어 내가 따라잡지 못할 때도 많다. 초기엔 블로그가 뭔지 설명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여성들이 자기만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가지고 있다.”
-당신의 책이 전세계 노년에게 용기를 주고 있지만 일부 예술가만 할 수 있을 법한 과감한 스타일에 ‘나와는 상관 없는 세계’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평범한 노년들에게 당신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어드밴스드 스타일’은 스타일 가이드가 아니다. 노화를 편안하게 받아 들이고 어떤 연령대에도 과감하고 창의적이고 눈에 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목적이다.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많고 옷 입기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블로그를 보면 뉴욕뿐 아니라 도쿄 등 다른 나라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도 많다. 각 도시별 노인들의 패션을 비교해줄 수 있나?
“각 도시뿐 아니라 모든 지역, 모든 골목마다 고유한 스타일이 있다. 도쿄에서는 고전적인 스타일에 독특한 요소들을 믹스매치한 사람을 만났고, 뉴욕에서는 과장된 우아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만났다. 언제 어디서든 우연히 이런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진보적인 스타일을 가진 남녀는 전세계 모든 도시에 있는 것 같다.”
-당신이 아는 최고의 시니어 패셔니스타는 누구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명만 집어 말할 수 없다. 내가 촬영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화가이자 댄서인 일로나 로이 스미스킨의 창의적인 스타일은 늘 기쁨을 주고, 작가 베아트릭스 오스트는 옷입기를 예술로서 접근한다. 그들은 모두 내 영감의 원천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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