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제목이 새롭지 않다. 비가 내리는 도입부부터 진부하다. 연쇄살인범을 잡는 형사가 스크린 중심에 서있다. 게다가 김상경이 형사를 연기한다. ‘살인의뢰’는 여러 모로 ‘살인의 추억’(2003)과 ‘추격자’(2008)를 떠올릴 만하다.
첫인상과 달리 영화는 ‘살인의 추억’과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김상경이 맡은 형사 태수는 베테랑이다. 치밀한 계산보다 감을 우선한다. 과학적 수사방법을 추구하던, ‘살인의 추억’의 태윤과 다르다. 볼록 나온 배와 다혈질 성격은 태윤과 대립각을 세우던 두만(송강호)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살인의 추억’대신 ‘추격자’가 간 길을 초반 따른다. 연쇄 살해범 강천(박성웅)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영화 서두부터 드러낸다. 여인들을 즐기듯 살해하는 강천, 단독주택 정원에 암매장된 희생자들의 모습은 ‘추격자’의 밑그림이 된 유영철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추격자’와의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범인을 어떻게 잡는가에 영화는 애초부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희생자 주변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이에 따른 복수심이 영화 전반을 지탱한다. 강천에게 아내를 잃은 승현(김성균)과, 승현의 처남 태수의 범죄자를 향한 비슷한 듯 다른 행보 위로 강천의 엽기행각이 겹치고 조폭들의 암투가 포개진다.
영화는 피가 넘쳐 흐른다. 몸 자체가 살인병기인 강천이 스크린을 피비린내로 채울 때 진저리가 처진다. 과유불급이다. 과도한 폭력 묘사는 법의 무력함을 꼬집기 위해 쓰인다. 유족들에게 끔찍한 악몽을 안긴 살인자는 동정이나 연민조차 없는데 법 집행은 너무 관대하다고 영화는 여러 차례 외친다. 사형수인 강천이 교수대에 오르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날것의 폭력이 배치된다.
사형제가 사문화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이 영화를 이끌어 가나 정작 시대의 공기는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악랄한 범죄자가 있고 억울한 피해자가 있는데 왜 법은 제대로 단죄하지 않냐고 영화는 거칠게 묻는다. 권위주의 시대가 공권력의 올바른 실행을 막은 것 아니냐고 에둘러 묻는 ‘살인의 추억’의 깊이 있는 질문과는 결부터 다르다. 우리 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아우성 같은 삶을 반영했던 ‘추격자’의 소슬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꼼꼼한 듯하면서도 서투르다. 강천이 희생자가 받쳐 들고 가는 우산 위로 둔기를 내려치는데 희생자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폐가가 다 된 집에 들어설 때 넘어진 화분을 보고선 승현이 누군가의 침입을 순식간에 알아챈다는 장면도 납득할 수 없다. 손용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청소년관람불가, 12일 개봉.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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