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자(亡者)의 지갑을 절도했다. 변사 사건을 취재하는데 경찰서 창가에 놓인 녀석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돈이 아니라 사연을 훔칠 요량으로 몰래 집어 들고 화장실로 갔다. 녹아 내린 살로 인해 눌러 붙은 지갑엔 지폐는 없고, 가족 사진과 수첩 쪼가리가 있었다. 라면 방값 등 지출내역을 잔뜩 적은 글은 ‘돈이 없다’는 문장으로 끝났다. 웃다가 정색했다.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지갑을 돌려주니 지청구가 쏟아졌다. “전에 다니던 회사 창고에서 목을 맨 지 3일만에 발견됐다, 지갑에 냄새가 배서 말리는 중”이라고. 보충 취재를 한 뒤 회사에 보고를 했다. 경찰도, 선배도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그런 사람 한둘이야?” 살면서 차차 알게 됐다, 그런 사람들 많다는 걸.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변주되면 오래 전 망자의 지갑 냄새(말로 설명할 수 없는)가 여전히 내 손가락에 머문 듯 코를 킁킁댄다. ‘기사 쓰게 유서라도 남기지’라는 천박한 직업정신과 ‘안타까운 죽음은 여전한데’라고 운을 떼곤 답을 찾지 못하는 알량한 책임의식이 버무려진다.
정부 고위 관료가 얼마 전 장그래를 언급한 그날도 그랬다. 그는 ‘미생’을 즐겨 보면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노라고 말했다. “불쌍한 장그래”라던 그의 측은지심은 결국 노동 등 4대 구조개혁의 차질 없는 완수라는 현 정부의 정책과제로 귀결됐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역시 취임 직후부터 청년실업과 “불쌍한” 비정규직을 거듭 강조했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이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숙원임을 강조하려고 일화까지(그런데 떠오르지 않는다) 곁들였다. 대학생들도 만났다(대화는 겉돌았다). 그런 선의를 담아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등의 법안을 만들어 ‘장그래법’이라 불렀을 텐데, 당사자들의 비판에 직면한 건 아이러니다.
사실 드라마 속 장그래는 불행하지 않다. 실패와 오랜 경력단절 뒤에 속칭 빽으로 대기업에 취직을 하고, 잠재력을 끌어올려주는 착한 상사를 만나고, 퇴사 후에 별 어려움 없이 새 직장을 얻는 행운이 현실에서 연달아 벌어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내 기억 속 망자는 수년간 취업 준비를 한 끝에 들어간 회사에서 1년도 안돼 잘렸다. 적응을 못했다는 주변의 진술이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30대 초반인 그는 재취업도 하지 못한 채 빈털터리라는 참담한 고백만 세상에 남겼다.
과거의 일, 특정 개인의 극단적 사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1년 미만 단기 노동자 비중은 10명 중 3명 남짓(32.8%)으로 OECD 주요 회원국 중 1위, 청년실업률(9.2%)은 역대 최악이다. 정부는 고용의 경직성을 문제삼지만 현실은 고용 불안정이 더 큰 숙제라고 증언한다.
나의 취업 과정도 지난했다. 노가다 아르바이트 시절엔 불합리한 회비 관행을 항의하다 쫓겨났고, 방돌이(모텔 카운터)를 할 때는 여관 방을 제 집처럼 여기던 깡패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1년 넘게 취직을 못했다. 언젠가 번듯한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요즘 청년들은 그런 희망마저 거세당한 것처럼 보인다.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그들에게 더는 내 얘기를 조언입네 하고 떠벌리지 않는다. 나 역시 어느덧 기성세대가 됐다는 자각 때문이다. 때론 선의가 더 악랄한 법이다.
최 부총리를 비롯한 관료들도 이제 “우리 때는 공부 안 해도 취업 잘됐는데”라는 식상한 레퍼토리를 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마 최저임금 인상에 공들이는 최 부총리의 최근 행보에 기대를 품어본다. 이달 발표한다는 노동 구조개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다면 ‘미생’ 대신 영화 두 편을 추천한다.
“뜨신 데서 발 뻗고 자는 것들이 한 데서 몸뚱이 떠는 것들 맘을 알겠나.”(카트)
“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내일을위한시간)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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