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지표 위기의 그림자 수출 1년 전보다 3.4% 감소
금리 인하 반대론도 강경, 한은 진퇴양난에
경기 지표들이 올 들어 일제히 주저앉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추가 인하로 경기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하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금리인하론자들의 목소리에 일시적으로 묻혀버린 듯하지만, 가계부채 부실화 우려와 함께 금리 정책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맞은편 주장의 무게는 그보다 무거웠으면 무거웠지 결코 가볍지 않다. “통화 당국이 위기 상황에 손 놓고 있다” “정부와 여론에 떠밀려 독립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상반된 비판에 포위된 채 이달 12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앞둔 한은의 고심도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지고 있다.
쏟아지는 금리인하론
경기 지표만 놓고 보면 기준금리 인하 필요성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연초 경기 지표는 내수, 수출, 물가를 가릴 것 없이 악화 일로다. 1월 전체 산업생산은 전달보다 1.3%, 제조업 경기를 대표하는 광공업생산은 3.7% 급락했다. 소비 지표인 소매판매도 전달보다 3.1% 감소했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도 지난 달 1년 전보다 3.4% 감소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0.5%)은 담뱃값 인상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마이너스다. 정부가 직접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을 정도다. 설상가상 올 들어 중국, 유럽, 호주 등 주요 교역국을 포함한 20여개국이 앞다퉈 통화완화를 단행, 원화 가치 상승으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이영 한양대 교수는 “현재 상황은 장기적 침체라기보단 비교적 소규모의 경기변동 국면”이라며 “재정정책에 비해 의사결정이 빠르고 신속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금리정책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 국면에 돌입한 만큼 디플레 영속화를 막으려면 추가 금리 인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경기는 심리’인 만큼 한은이 적극적인 금리 인하를 통해 시장을 상대로 ‘치어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한은이 금리 인하 신중론을 펴면서 내놨던 근거들이 설득력을 잃었다는 주장도 있다. 저물가 장기화에도 한은이 수년째 저유가 등 공급 측 요인만 강조하는 것은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태윤 교수는 “한은의 신중론 중 그나마 설득력 있는 것은 가계부채 문제인데, 이 또한 금리 인하를 통한 이자 상환 부담 완화와 가계부채 총량 관리를 병행하며 풀어갈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여전히 강경한 동결론
하지만 금리 인하가 지금의 경기 악화에 대한 최적의 해법인지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일단 금리 인하는 필연적으로 가계부채 급증으로 이어져 가뜩이나 약화된 소비 여력을 더욱 줄일 수밖에 없다. 김경수 성균관대 교수는 “1990년대 일본의 전례처럼 우리나라도 2012년경부터 가계부채 부담이 소비지출을 제약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금리를 내려 내수 회복을 도모하는 정책이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가계부채 확대라는 엄청난 부작용을 감내하면서까지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한다면, 이를 능가하는 경기 부양 효과를 거둬야 한다. 하지만 디플레 방지책으로도 금리 인하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장 전망대로 국제유가가 올해 하반기부터 상승한다면 6개월 이상의 시차를 두고 효과를 내는 기준금리 인하 카드는 부적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유동성이 넘치는 상황에서 금리정책을 부양책으로 동원한다면 유동성 함정(돈을 풀어도 부양효과를 못 내는 상황)에 깊이 갇힐 수 있다”(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우려도 있다.
통화완화 정책으로 자국의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세계 각국의 환율전쟁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이 나온다. 현재 우리의 환율 수준이 수출에 대단히 악영향을 줄 정도가 아닐 뿐더러,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력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포위된 한은
한은은 금통위 회의를 앞두고 기준금리 인하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자 잔뜩 긴장하는 분위기다. 한은 관계자는 “금리 인하 반대는커녕 신중론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일방적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금리 인하 압박을 한동안 자제해왔던 정부가 “디플레이션 우려로 큰 걱정을 하고 있다”(최경환 부총리), “기준금리 효과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 등 다시금 관련 발언을 개시한 것도 한은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정부가 경기부양이나 구조개혁 성과가 미진하자 한은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고 했다.
그렇다고 금리인하 쪽으로 행보를 돌려 세우기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축구로 따지자면 ‘골키퍼‘ 역할을 해야 할 한은이 볼을 몰고 공격에 나서면 골대(가계부채)는 누가 지키느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한은 고위 인사는 “지금은 여론이 금리 인하를 떠밀고 있지만 나중에 가계부채 뇌관이 터지면 금리 인하의 책임을 모두 한은에 묻지 않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독립기관으로서의 자존심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한 금통위원은 최근 사석에서 “지금 금리를 내린다면 정부와 여론에 등 떠밀려 금리를 낮추는 꼴이 되는 것 아니냐”고 난감한 상황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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