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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美日과 공유할 가치

입력
2015.03.0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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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일본 외무성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내용 일부를 바꾼 게 화제였다. ‘우리나라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 나라’라는 설명에서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삭제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로 표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처음 전한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변화의 배경에 “한국 사법,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이 있고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으로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이 기소된 것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전했다.

겸양지덕(謙讓之德)에 일일삼성(日日三省)이라고 했으니, 대인(大人)인 척이라도 하려면 일본을 욕하기 전에 정말 우리가 그런 소리 들을 일을 했는지 먼저 돌아보는 게 도리일 것 같다. 보도를 통해 짐작하자면 일본은 한국이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진 건 아닌 듯 하다. 아마도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쪽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국제앰네스티가 지난달 말 발표한 ‘연례 인권보고서’가 퍼뜩 떠오른다. ‘박근혜 정부 2년에 접어들면서 인권이 후퇴하는 경향’이라고 입을 뗀 앰네스티는 “정부가 계속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위협하고 구금하는 사례가 늘면서 표현의 자유가 점점 제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시위를 하던 참가자들이 경찰에 체포되고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노인들이 경찰 진압에 다친 사실도 거론했다. ‘민주주의’가 훼손된 대표적인 사례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다. 일본 정부의 생각과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한국이 ‘자유’가 억압 받고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사회라는 것은 국제인권기구와 한국 사법부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본을 두둔한다고 오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나는 적어도 아베 정권은 한국을 향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집권 이후 그는 시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특정비밀보호법을 도입했고, 일본 헌법의 평화주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첫 단추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했으며, 안전에 대한 일본 시민들의 간곡한 바람을 무시한 채 원전 재가동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많게는 20만명, 적게는 수천 명이 이런 문제로 총리 관저를 벌써 몇 차례나 에워싸며 아베를 압박했다.

일본 외무성의 이번 삭제 소동을 보며 헛웃음이 난 것도 그 때문이다. 제자 논문 가로채 실적 쌓은 교수가 표절로 학위 받은 동료 교수를 향해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욕하는 꼴이라고나 할까.

상황은 달랐지만 리퍼트 주한 미 대사 피격 사건 후 이런저런 일을 보면서도 역시 헛웃음을 금치 못했다. 우선 이 사건을 전한 다수의 신문들이 ‘한미동맹’이 ‘테러’ 당했다는 제목을 썼다는 점이다. 행간에서 ‘한미동맹’ 자체가 이미 숭고한 가치가 돼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동맹’ 자체가 아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국가간 ‘동맹’이라는 형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기 직전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과거사 발언에 격노하는 한국의 여론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발언의 경솔함은 따져야 할 일이지만 한국 여론의 그 격한 반응 속에는 나만을 사랑하는 줄 알았던 연인에게서 버림 받은 뒤 치솟아 오르는 분노 같은 것은 없었을까.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리퍼트 피격 이후 광화문 일대에 군복 입은 노인 부대가 등장하고 기도회와 부채춤, 발레공연에 개고기 진상까지 벌어지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본적 가치’란 사람 사이는 물론 국가간에도 매우 중요하다. 전제가 있다. 공유해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에만 바랄 게 아니라 나도 갖추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김범수 여론독자부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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