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국제분쟁 해결사로 우뚝
과거사·원전 문제 입장 밝힐지 주목
지구촌에는 많은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있다. 가까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최근 재선에 성공한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미국에서 대선 도전을 꿈꾸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손꼽힌다.
이 가운데서도 2005년 취임해 3선 장기집권으로 독일을 이끌고 있는 메르켈(60) 총리의 리더십이 단연 돋보인다. 유럽에서는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 이후 가장 우뚝한 여성 지도자로 자리매김된다. 그는 대처와 이미지부터 다르다. 별명이 ‘엄마(무티)’다. 2017년까지 임기를 채우면 대처 총리가 세운 11년 반의 집권 기록을 깨는 여성 지도자가 된다.
옛서독에서 태어났지만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가 물리학자의 인생을 걷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의 최대 치적은 역시 독일 경제를 살린 것이다. 재임 중 세계금융위기로 유럽은 물론 전세계가 휘청거릴 때도 독일 경제는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재임 10년 동안 3% 안팎의 성장률에 낮은 실업률로 진보 신문마저도 ‘독일이 지금보다 부유한 적이 없었다’는 극찬을 할 정도다.
물론 이 같은 성공적인 내치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 사실상 유럽을 지탱하는 지도자이면서 우크라이나 문제 등 국제분쟁에서도 역량을 발휘한다는 점이 메르켈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크림반도 합병 등으로 확장정책을 펴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서유럽 지도자가 메르켈이다. 그가 최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키예프-모스크바로 릴레이 회담을 하며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가 9일 일본을 방문해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한다. 7년 만의 일본 방문에서 메르켈이 독일과 일본의 공통분모라고 할 과거사 문제에 관한 발언을 할지 주목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독일 정부가 5일 개최한 기자 간담회에서 독일 매체로부터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에 관한 질의가 쏟아졌으며 독일 정부 소식통은 “역사 인식이 정상회담의 의제가 된다”는 발언을 했다고 8일 전했다. 경제협력이나 인구 감소 등이 우선 의제가 될 것이고 메르켈 총리가 역사 인식을 일부러 언급하려 하지는 않겠지만 관련 질문을 받는다면 솔직한 답변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1박 2일 방문 일정 중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언론인 아사히신문사 강연을 잡은 것도 눈길을 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오보 인정 이후 우익들의 집요한 비판을 받고 있다. 슈테펜 자이베르트 독일 정부 대변인은 2013년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자 “일본의 국내 정치와 관련한 질문에 답변하길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는 20세기의 끔찍한 사건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정직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메르켈이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더라도 아베를 비판하는 발언을 할 가능성은 적다. 적대국끼리 싸우려고 만난 것도 아닌데 아무리 정의로운 발언이더라도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독일 정부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독일을 방문해 일본을 겨냥한 아우슈비츠기념관 방문을 요청하자 이를 정중히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일 과거사 갈등에 말려들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메르켈은 원자력발전소 문제만은 아베에 쓴 소리를 할 생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메르켈은 7일 독일 정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영상 메시지에서 자국이 2011년 3월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 발생 후 조기 탈원전을 결단하고 재생에너지 보급을 추진하고 있다며 “일본도 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권유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전했다.
그는 이 메시지에서 “일본은 섬나라이므로 자원 확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독일과 일본이)원자력을 둘러싸고 다른 길을 걷는 이유는 거기 있을지 모른다”면서도 후쿠시마 사고의 경험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것은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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