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어려움 처한 피해자들 한탕주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
사기 단죄 쉽지 않아 전과자 양산, 비정상적 돈벌이 거리낌 없어
인쇄업자 이모씨는 2014년 김모(38ㆍ여)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삼성에 판촉물을 납품하는데 제작비를 대면 이익금을 두둑하게 챙겨주겠다”고 한 것이다. 장사도 시원치 않은 터에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한 이씨는 1,800만원을 선뜻 내주었다. 그러나 김씨는 삼성에 납품할 판촉물을 만들기는커녕 직업조차 없던 사기범이었다. 지난달 구속될 때까지 김씨가 피해자 8명에게서 챙긴 돈은 8억원이 넘었다.
거짓말로 남을 속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는 대표적인 한국형 범죄다. 범죄 유형별 국가 순위에서 늘 수위를 차지해 한국을 부끄럽게 만드는 범죄이기도 하다. 그 만큼 한 순간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뒤늦게 후회하는 피해자도 증가하고 있다. 조금만 따져보면 터무니없는 걸 금방 알 수 있는데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 역시 한국적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사기범과 피해자를 막론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이라도 좋으니 한 몫 챙겨보겠다는 욕망이 사기사건 증가의 요인이라고 진단한다. 최근 디플레이션 공포가 커질 정도로 경제여건이 어려운 것도 ‘한탕주의’사기를 부추긴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사기사건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8일 경찰청에 따르면 사기로 경찰 조사가 이뤄진 사건은 지난해 23만,8643건으로 2013년에 발생한 음주운전 사건(23만4,853건)보다도 많았다. 일본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게다가 2010년 20만3,799건에 비해 5년 동안 약 3만5,000건이 늘어났다.
사기에 대한 단죄가 쉽지 않다는 점은 사기범을 양산하는 큰 이유다. 형법은 사기범을 징역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구제는 민사소송을 통해야만 한다. 때문에 2013년 기준으로 사기범으로 검거된 이들 23만9,309명 가운데 21만5,536명이 한 번 이상 동종 전과를 가진 사람이다. 10명 중 한 명꼴인 4만8,684명은 전과 5범 이상이라는 것도 이들이 사기죄를 두려워 하지 않고 ‘한탕주의’를 계속하는 현 주소를 보여준다.
경찰청 인사는 “범인 입장에서는 ‘세치 혀’로 한 번에 큰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속인 뒤, 안 되면 말고, 넘어가주면 좋다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노동의 땀을 대가로 돈을 벌기보다 손쉽게 이익을 얻으려는 피해자들의 생각이 범죄의 조건이 되고 있다”며 사기범이 줄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일반인들의 경제적 어려움도 사기사건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먹고 살기는 점점 어려워지는데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보니 거짓말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충남 아산에서 정미업을 하다가 9,000만원 상당의 사기를 당한 A(56)씨는 “한달 한달 사는 게 어려운데 물건만 납품해주면 금방 돈을 준다고 하니, 의심도 못하고 속았다”고 털어놨다. 황태정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제가 어려워지면 한 몫 잡으려는 범죄가 늘게 마련”이라고 분석했다.
2~3% 정도의 낮은 은행금리로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막대한 시중의 부동자금도 사기범들이 줄지 않는 배경이다. 돈을 가진 사람들도 크게 한 번 돈을 더 벌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피해를 자초하는 것이다. 여행업체 대표에게 속아 2011년부터 2년 동안 151억원이나 투자를 했던 14명 피해자들은 경찰에서 “비수기에 항공권을 사두면 나중에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고 뒤늦게 욕심을 책망했다. 이 사건의 사기범 정모(43)씨는 징역 7년이 선고됐지만 피해자들이 돈을 찾을 길은 없었다. 권력을 사칭한 사기에 당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 같은 경우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결국 ‘한방’에 돈을 벌려는 사기범이 똑같은 생각을 하는 피해자의 심리를 파고 들어가는 게 사기인데, 경제상황이 이런 범행 여건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찰청은 최근 급증하는 사기 범죄에 대해 9일부터 각 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전담팀을 마련, 대처하기로 했다. 특히 전화대출을 포함한 금융사기, 중소상공인 상대 사기, 노인 대상 사기를 3대 악성사기로 규정하고 집중 단속하기로 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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