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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열정이라는 유한한 에너지

입력
2015.03.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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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젊음의 고장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스무 살 적에 사랑했거나 강렬하게 즐겼던 것을 마흔 살에 다시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광기, 거의 언제나 벌을 받게 마련인 광기다.” 카뮈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벌을 받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광기에 휩싸여 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내가 아직 말랑말랑한 심장을 지녔던 시절에 사랑했던 곳으로 돌아왔으니.

태국 북부의 도시 치앙마이에 머문 지도 어느새 두 달째 접어들고 있다. 당연하게도 1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면에서 달라졌다. 사표를 내고 세계일주를 막 시작했던 그 무렵의 나는 뜨거웠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었던 만큼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맥주병인 주제에 따오 섬에서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두 단계나 따고, 끄라비에서는 바위 절벽에 매달려 ‘등반’보다는 ‘추락’이 더 잦은 암벽 등반을 하며 보름을 보내기도 했다.

치앙마이로 올라와서는 저녁마다 인공암벽을 오르고, 마사지 학교에 등록해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요리학교에서 태국요리를 5일간 배우기도 했다. 처음 보는 것은 뭐든 신기했고, 나 또한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8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숙소에서 잠을 자고, 거리의 노점에서 매끼를 때우면서도 내가 엄청난 행운아로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이제 40대 중반이 되어 치앙마이에 돌아온 나는 지난 한 달간 무엇을 했던가. 새로 무언가를 배우기는커녕, 과거의 추억을 밑천 삼아 빈둥거렸을 뿐이다. 서울에서 친구가 잠시 다니러 왔을 때 요리 강습을 다시 받았지만 젊은 선생의 미숙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배웠던 마사지 기술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돈을 내고 받으러 다닌다.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이빙 같은 건 꿈도 안 꾼다. 햇살이 조금만 강해지면 양산을 펴들고 그늘을 찾아다닌다. 다 해봤으니까 다 안다고 믿는 착각과 새로운 것은 없다는 오만. 나이가 들며 이렇게 나는 무뎌지고 단단해진다.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 중에 가장 아쉬운 건 열정이다. 한때 나는 세상과 사람을 향한 못 말리는 열정과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 두 가지야말로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들어온 것들이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다른 세상은 없는지, 인생에 정말 정답이란 게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여행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12년을 흘러오는 동안 기운이 빠져 시들시들해진 내가 남았다. 철이라도 녹일 기세로 타오르던 열정의 용광로가 이제는 고구마나 겨우 구워낼 수 있는 잔불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우연히 눈에 들어온 웹툰을 마저 보기 위해 심카드를 교환해가며 결제를 마치는 일에나 열정을 발휘할 뿐이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열정도 휘발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세월과 함께 뜨거움은 식어간다. 지구의 자원처럼 열정도 유효기간이 있는 유한한 에너지일 뿐이다.

예전의 나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라고 쉽게 말하곤 했다. 열정이 있다면 아무리 고단한 환경도 기꺼이 견뎌냈던 날들이 내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열정은 마법의 선글라스 같은 거여서 그걸 끼고 있는 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하지만 열정이 휘발될 수 있는 감정임을 알게 된 지금은 열정을 좇아 살라고 말하기가 꺼려진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열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열정마저 착취하려 들 뿐이다. ‘열정페이’라는 부끄러운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다. 전국시대의 연나라 소왕은 “천금을 주고 죽은 천리마의 뼈를 산다”는 천금매골(千金買骨)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될 만큼 인재를 구하는 일에 매달렸다. 천금을 주고 인재를 찾지는 못할망정 교통비도 되지 않는 급여를 주며 열정으로 일하기를 강요한다. 분노를 넘어 슬픔이 치민다.

최근 연이어 일어난 어린이집 폭행사건에 열악한 조건을 열정만으로 감수하게 한 우리의 책임은 없는 걸까. 현실이 너무 가혹해 이제 연애나 결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대한 열정을 품기조차 버겁다. 열정이 고갈된 청춘들에게 이 나라는 어떤 색으로 보일까. 사랑도, 초심도, 열정도 모두 유한한 자원이다. 그 유한한 에너지를 오래 유지할 수 있게끔 시스템을 갖춰주지 못한 세대가 되어 미안할 뿐이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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