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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초고를 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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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초고를 읽는다면

입력
2015.03.0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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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지음ㆍ김우열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456쪽ㆍ1만5,800원

편집자가 도려낸 카버의 출세작

남편 사후 아내가 원본 모아 출간

세련미는 다소 떨어지는 대신

독자 감정선 건드리는 뭉클한 감동

레이먼드 카버의 '풋내기들'에는 편집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뜨겁고 촉촉한 감성세계가 있다. 덜 세련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 독자들의 가슴을 건드리는 세계다. 문학동네 제공
레이먼드 카버의 '풋내기들'에는 편집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뜨겁고 촉촉한 감성세계가 있다. 덜 세련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 독자들의 가슴을 건드리는 세계다. 문학동네 제공

레이먼드 카버(1938-88)의 이 책은 특별한 독서법을 요한다. 일단 두 권이 필요하다. 이 책 ‘풋내기들’과, 이미 출판돼 널리 읽힌 바 있는 그의 출세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두 책은 동일한 책이면서 전혀 다른 책이기도 한 기묘한 관계에 놓여있다. 전자가 후자의 초고 원본, 즉 편집자가 손을 대기 이전의, 온전히 작가 혼자서만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문학연구자도 아닌데 무슨 초고 원본씩이나 읽으란 말인가 싶다면 두 작품의 상이점, 아니 편집자가 과연 작가의 작품에 이 정도까지 손을 대고 변형을 가해도 좋은가 하는 문제제기부터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 일단 분량. 해설 등을 뺀 소설 분량만 번역본 기준으로 425페이지인 원본이 고든 리시라는 걸출한 편집자의 빨간 펜에 의해 238쪽으로 줄어들었다. 책에 실린 17편의 단편을 적게는 9%에서 많게는 78%까지, 평균적으로 40~60% 가까이 마구 쳐냈다. 구글로 검색해보면 수 페이지에 연달아 좍좍 줄을 그어 날려버린 편집본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국 문단의 풍토에서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폭언과 주먹다짐이 우려되는 상황이건만, 카버는 끙끙 앓기만 했던 것 같다. 편지를 보내 “밤새 생각했는데 도저히 편집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책이 이대로 출간되면 다시는 글을 못 쓸지도 모르겠다”며 원본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한 게 다다. 그러나 책은 편집본으로 출간됐고, 그것이 오늘날의 세련된 소설가라면 무릇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해야 마땅한 작가(가장 유명하게는 무라카미 하루키부터 국내작가로는 2013년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손보미까지), 레이먼드 카버의 미니멀리즘 스타일이 되었다. 그는 비록 “미니멀리스트라는 말에는 비전과 완성도가 미약하다는 느낌이 있어서 싫다”고 말한 바 있지만.

‘풋내기들’은 언젠가 원본대로 책을 내리라는 카버의 결심이 50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좌절되자 그의 아내가 오리지널 버전의 원고들을 모아 2009년 출간한 책이다. 책은, 조금 과장하자면, 충격적이다. 절반 가까이 잘려나간 분량뿐 아니라, 인물들의 이름, 문장, 제목, 심지어 주제와 결론마저 다른 작품들이 꽤 된다. 읽다 보면 ‘이건 편집자가 쳐냈겠는데’ 싶은 상세한 심리 묘사와 서술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니나다를까 편집본을 살펴 보면 죄다 잘려나갔다. ‘이렇게 뭉클한 부분을 쳐냈을 리가’ 싶어서 들춰봐도, 과감하게 쳐냈다. 미니멀리스트의 눈에 질척거리는 것은 구질구질한 것이므로, 과도한 생략과 감추기로 독자가 어리둥절해지는 한이 있어도 빨간 줄은 불가피하다. 이 일급의 편집자에게는 섣불리 희망의 메시지를 불어넣는 것만큼 촌스러운 것도 없으므로 결말은 건조하고 삭막해야 한다.

‘외도’의 경우. 이혼 후 연락 없이 살아가던 아들에게 자신의 외도로 상간녀의 남편이 자살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도 황무지가 되어버렸음을 토로하는 아버지의 긴 고백: 외도로 충분, 상간녀 남편의 자살 이후 부분은 모조리 삭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아들이 생일날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빵 가게의 주인이 왜 미리 주문해 놓은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냐며 항의성 장난전화를 하자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한 부부가 빵 가게를 찾아가고, 부부의 사연을 들은 주인은 사죄하며 갓 구운 빵을 내놓는다. “드시고 살아내셔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거든요.” 뜻밖에 부부는 허기가 지고, 주인은 계속 빵을 내온다. 실컷 울고 난 부부는 밤이 새도록 빵을 먹는다: 빵 가게 주인의 장난전화가 걸려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충분, 이후 모두 삭제.

이 정도 되면 우리가 그간 읽어온 것이 레이먼드 카버인지, 고든 리시인지 회의가 든다. 하지만 책을 펴낸 카버의 아내는 “나의 관심은 두 버전 중 무엇이 더 나은지를 비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 책과 세 번째 소설집 ‘대성당’ 사이를 잇는 결합조직과도 같은 오리지널 버전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풋내기들’은 카버의 대표작 ‘대성당’의, 그 도저한 절망 속에서도 희미하게 감지되는 희망의 기운이 어디서 배태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책으로 유의미하다. 참, 카버는 그 일 이후 편집자와 결별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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