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ㆍ김정하 옮김
책세상 발행ㆍ388쪽ㆍ2만원
2010년 7월 런던 경매전문회사 크리스티에서 ‘폴리필로의 꿈’이란 책이 5억4,000만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됐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프란체스코 콜론나가 1467년 쓴 이 책은 고대 신화의 형식을 빌린 우의적 이야기, 포르노에 가까운 선정적 묘사 외에도 예술성 높은 목판화와 아름다운 장정 덕에 “르네상스 시대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은 베네치아에 위치한 알디네 인쇄소에서 처음 나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어쩌면 전세계 출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이 인쇄소의 주인은 출판계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알도 마누치오다. 필기체를 처음 만들고 문고본(포켓북)을 창시했으며 최초의 베스트셀러를 인쇄하고 독서를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의 취미로 만든 이 혁신가가 고향인 로마를 떠나 베네치아에 인쇄소를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이자 기자인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의 저서‘책 공장 베네치아’는 책의 천국이었던 16세기 베네치아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다. 아랍어로 쓰인 코란과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가 최초로 인쇄된 곳, 악보집과 건축화보가 처음 출판된 곳, 최초의 요리책과 게임책, 포르노책이 나온 곳, 쉼표와 어퍼스트로피와 세미콜론과 악센트 부호가 처음으로 책에 도입된 곳. 16세기 베네치아는 세계 최대 인쇄소와 다국적 출판사들을 보유한, 그 자체로 거대한 책 공장이었다.
저자는 베네치아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고향 독일을 제치고 출판 산업의 발원지가 된 이유를 당시 유럽 사회상을 통해 분석한다. 16세기의 베네치아는 곤돌라가 한가로이 도시 복판을 유영하고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오늘날의 베네치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는 현재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같은 지중해의 큰 섬들까지 차지한, 유럽 전체에서 가장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국가였다. 출판 활성화를 위한 세 가지 조건―지식인의 결집, 풍부한 자본력, 뛰어난 영입 활동―을 베네치아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로부터의 자유였다.
“독일에서는 인쇄술이 가톨릭교회의 원조 아래 발명된 반면, 베네치아에서는 인문주의에 고취된 귀족들의 재정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었다. … 교회 권력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며 종교재판은 느지막이 약하게 시행되었다. 16세기 전반기에 베네치아에서 인쇄의 자유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부유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베네치아에 기업인들이 꽃에 날아드는 벌들처럼 모여들었던 것은 당연하다.”
자유와 자본을 좇아 베네치아로 몰려든 사람들 중 알도 마누치오가 있었다. 당시 인쇄업자들이 압착 인쇄기를 다루는 노동자들이었던 것에 반해 그는 그리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마누치오가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된 이유에 대해 한 학자는 “오류가 넘쳐나는 그리스 고전을 읽는 데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누치오가 “언어에 매료된” 인간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언어의 풍부한 뉘앙스에 푹 빠져 있었고 정확한 발음과 올바른 문법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렸다.
무엇보다 마누치오는 독서가 취미가 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최초의 출판업자’로 기록될 만하다. 당시 책이 대중화되지 못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비싼 종이 가격이었는데, 마누치오가 개발한 비스듬한 필기체는 공간을 덜 차지하고 행간을 좁힐 수 있었기 때문에 종이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포켓북의 고안이다. 마누치오는 거대한 2절판 책들 대신 8절판으로 고전을 인쇄했다. 그가 출판한 페트라르카의 시선집 ‘칸초니에레’는 10만부 이상 팔리며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저자는 마누치오뿐 아니라 베네치아를 책의 천국으로 만든 이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그들이 베네치아에서 이룩한 책의 혁명은 지식의 탄생을 이끌었고, 이는 우리가 지금 알고 배우는 거의 모든 것들의 토대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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