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 나야” “필화야”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 상봉 역사에 있어 가장 극적이었던 순간 중 하나가 한필성 한필화 남매의 일본 삿포로 만남 장면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어머니에 의해 쫓기듯 평남 진남포를 떠났던 16세 청년 한필성은 40년 만에 이국 땅에서 8살 아래 여동생과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그보다 앞선 71년, 북한 빙상선수로 일본을 찾은 여동생과의 전화상봉은 전국에 생중계되며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었다. 다시 19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오누이의 상봉은 이뤄졌다. 북한 빙상선수단 임원이 된 동생 필화가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제2회 동계아시안게임에 참가한 것이다. 1990년 3월 8일 동생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오빠 필성(오른쪽)이 삿포로 치토세 공항에서 동생을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국일보 박태홍기자는 이 사진으로 27회 한국보도사진전 은상을 수상했다.
손용석 멀티미디어부장 stones@hk.co.kr

남매 상봉의 계기는 1971년으로 되돌아간다.
1964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북한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출전한 한필화는 3000m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아시아 여성 최초의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 올라 유명세를 탔다. 71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프레올림픽에 참가한 북한선수단 사진에서 동생을 발견한 오빠는 혈육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일본 아사히 신문이 두 사람의 국제통화를 주선했고 "오빠, 오빠 나야" "필화야..." 하며 울부짖는 남매의 목소리는 방송을 타고 생생하게 중계됐다. 오빠 한필성은 바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지만 남북한 당국은 상봉 장소를 두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다 상봉은 무산됐다. 분단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남매는 결국 90년 재회의 기쁨을 누렸지만 그 후 긴 이별은 계속됐다.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1990년 3월 8일 일본 삿포로 치토세 공항은 상봉 장면을 위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내외신 기자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일보 박태홍기자는 공항으로 향하는 한필성씨의 동선을 미리 체크, 한 정거장 이전 전철역에서 동승함으로서 차별화된 앵글을 취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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