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태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 일상 속 근대가 남긴 모순 이야기

전성태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것을 계기로 강의를 하러 학교를 찾은 적이 있다. 소설만 보고 이미 작고한 문인인 줄 알았던 학생들은 작가를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비할 데 없이 맛깔 난 방언과 해학, 풍자로 점철된 전성태의 소설은 김유정의 ‘봄봄’과 나란히 놓아도 시대적 이질감이 없다. 농촌, 향토, 민중이란 단어는 20년 간 줄기차게 작가의 이름을 수식했다.
6년 만에 펴낸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창비)은 공고히 구축된 작가의 세계 내부로부터 일어난 균열의 기록이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쌓인 열 두 편의 단편소설에는 작가의 가장 두드러진 개성이자 무기였던 향토성을, 이제껏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던 일상이라는 주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5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이를 “문학으로 호흡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20년은 작가로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중 진짜 ‘내 것’을 거르고 분리했던 시간입니다. 저는 원래 문학을, 사회를 향해 작가의 목소리를 내는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작품에서 작가의 삶이 배제된다면 그건 정직하지 않은 거겠죠.” 그를 한국 농촌문학의 후계자로 불리게 한 예의 향토성에 대해 작가는 “아무리 (향토성이) 가치로운 일이라고 해도 내 기억과 너무 동떨어졌다면 그것 또한 정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작품은 소설집 첫머리를 장식한 ‘소풍’이다. 단란했던 가족 소풍이 장모의 치매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박살이 나는 순간을 섬뜩하게 포착한 단편으로, 지난해 치매로 별세한 작가의 어머니가 집필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그가 작가의 사회적 책무를 버리고 일상에 침잠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화를 안고’는 한 초등학교 교사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사망한 청년의 무덤을 향해 애도인지 죄책감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품고 은밀한 추모식을 올리는 이야기다. 작품 속 교사가 실제 작가의 초등학교 스승을 모델로 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삶은 시대의 아픔과 자연스럽게 만난다. “지금도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는 5?18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일상을 소재로 한다는 건 제 삶을 풀어놓겠다는 게 아니라, 일상을 통해 근대가 남긴 모순을 들여다본다는 의미가 큽니다. 특정 사건을 언급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시대의 통증을 이야기함으로써 공명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남파 간첩과 중공군의 묘지 앞에서 농사를 짓는 노인이 반공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에서 겪는 갈등(‘성묘’)이나 한국에서 10년 간 일하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불법체류자의 짐 속에 든 고추장 닭발(‘배웅’)까지, 작가는 이 땅을 할퀸 각종 통증을 다양한 방식으로 호출한다. 5?18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까지 과거의 일로 치우고 싶어하는 사회를 향해, ‘당대’의 범주를 좀더 늘려보자는 제안이다. “현대인이 불안한 건 삶의 지향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기억이 많으면 빨리 달릴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기억은 사람 그 자체이고 넓게는 사회 그 자체입니다. 세월호에 경제가 발목을 잡히면 안 된다는 말은 정말 웃긴 얘기지요.”
작가가 봄부터 창비에 연재할 장편소설은 작가의 기억과 근현대의 상처가 결합한 이야기다. 작가와 동향인 레슬러 김일, 권투선수 백인철 등을 등장시켜 스포츠 영웅들이 어떻게 근대화를 이끌었는지를 조명, 근대의 영웅신화를 풍자적 시선으로 돌아본다.
“자신이 딛고 온 시간을 잘 간직하는 사회가 진짜 질적으로 성숙한 사회입니다. 그 간직의 임무를 담당한 사람들이 작가이고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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