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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풍문으로 탄핵하다

입력
2015.03.0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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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법 중에 풍문탄핵제(風聞彈劾制)라는 것이 있다. 풍문거핵(風聞擧劾)이라고도 하는데 풍문만으로도 관리를 탄핵할 수 있는 제도로서 관리들의 불법과 부정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법이었다. 조선은 선비들의 염치를 중히 여겼기에 언관의 탄핵을 받으면 사실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직해야 했다.

조선 정종 2년(1400) 4월 대사헌 권근(權近)이 “사헌부는 이름이 풍헌관(風憲官)이므로 풍속 등을 바로잡는 일을 하는데 풍문으로도 모두 탄핵합니다. 지난번에 풍문으로는 공사(公事)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풍문이 아니면 어떻게 인심을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정종은 “그대의 말이 맞다. 그러나 풍문으로 공사하는 것은 태상왕(太上王ㆍ태조)께서 금지하셨으므로 가볍게 고칠 수 없고, 지금 시행하려고 하면 마땅히 다시 입법(立法)해야 한다”고 거부했다(정종실록 2년 4월 1일).

정종은 물론 태종도 태상왕 이성계가 만든 법을 바꿀 수는 없었고 풍문탄핵을 계속 금지시켰다. 그러나 언관들은 풍문탄핵을 계속했고, 대신들이 포진한 의정부에서 태종 4년(1404) 10월 태종에게 풍문탄핵의 금지를 재차 요청한 것처럼 고위관료들은 풍문탄핵의 금지를 거듭 요청했다. 태종 5년(1405) 7월 17일 사헌부에서 다시 ‘당(唐)나라 ‘백관지(百官志)’를 상고해보니 풍문탄핵제가 있었고, 전조(前朝ㆍ고려) 때도 풍문탄핵제가 있었다’면서 “이 때문에 권귀(權貴)와 토호(土豪)가 법을 두려워해서 감히 그른 짓을 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논리로 부활을 요구했으나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헌부에서는 10여일 후인 그 달 26일 다시 상소를 올려 풍문탄핵제의 시행을 요구했는데, 그 계기는 ‘정탁(鄭擢) 살인사건’이었다. 정탁은 조선 개창에 공을 세운 개국 1등 공신이자 태종 이방원 즉위에 공을 세운 정사(定社) 2등 공신으로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염치는 없고 욕심만 많으면 못하는 짓이 없는 법인데, 정탁이 그런 인물이었다.

정탁은 태종 3년(1404) 내시별감(內侍別監) 노적(盧績)의 노비를 빼앗았는데, 상대가 겹공신이므로 고민하던 노적이 신문고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헌부에서 정탁의 처벌을 요청하자 태종은 해풍(海豊)에 있는 농사(農舍)에 안치하게 했다가 다시 판한성부사로 복직시켰다. 그런 정탁은 급기야 살인죄까지 저지른 것이다. 정탁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풍문탄핵제가 금지되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수사에 나설 수 없었다. 그때 죽은 사람의 형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바람에 사건이 드러났고 사헌부에서는 “정탁이 지금 또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직첩(職牒)을 거두고 율(律)에 의해서 법을 시행하소서”라고 요청했다.

율에 따르면 사형이었다. 태종은 영해부(寧海府)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감해주었는데, 사헌부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상소를 올려서 “정탁(鄭擢)이 살인한 것도 부(府ㆍ사헌부)에서 풍문으로 들었지만 죽은 자의 형이 호소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움직였는데, 만약 그 형이 없었다면 그 원통한 것을 펴지 못했을 것입니다(태종실록 5년 7월 26일)”라면서 풍문탄핵제의 시행을 요구했다. 태종은 “만약 풍문탄핵제를 시행하면 아래에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니 불가능하다”라고 다시 거절했다. 세종도 풍문탄핵을 금지시켰으나 언관들은 풍문탄핵을 강행했다. 세종은 재위 26년(1444) 6월 풍문으로 탄핵했다는 이유로 대사헌 권맹손(權孟孫)을 비롯한 사헌부 전원을 좌천시켰으나 언관들은 풍문탄핵을 그치지 않았고 풍문탄핵제는 국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제도로 정착되어갔다.

풍문탄핵제는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처음 시작한 제도였는데 이 때문에 앞에서 “당나라 ‘백관지’에 풍문탄핵제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풍문탄핵제는 각 왕조와 군주에 따라서 폐지와 부활이 거듭될 정도로 논란이 많던 법이었다.

국회를 통과한 김영란법, 즉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법이 처음 국회에 제출된 2012년 8월 이후 무려 30개월 동안 무엇하고 있다가 이제야 ‘졸속’이라고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시행까지 1년 6개월이란 긴 기간을 둔 자체가 더 이해 가지 않는다. 정권 차원의 악용을 방지하는 문제와 법망을 빠져나간 부분들을 보완하는 문제에는 시선이 간다. 이 법에 대한 발목잡기 대신 ‘클린 코리아’ 운동 등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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