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많이 받으세요.’ 이 말을 이번 설에도 잔뜩 들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들었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해마다 들었다. 복(福)의 사전 뜻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이다. 그러니까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올해 만족할 만한 행운을 누리고 그것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세요’라는 소리다. 만족할만한 행운과 행복감. 아, 말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복은 보일 시(示) 옆에 가득할 복(?)이 붙은 글자다. ‘?’은 입을 밭에 대고 있는 구조다. 밭에 입을 붙이고 있으니 소박하게는 먹고 살기 궁색하지 않다는 뜻이고, 크게는 재산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示’는 제사 때 쓰는 제기의 형상이 문자화된 것으로 신이나 하늘이 그렇게 하게 해준다는 믿음이나 염원을 담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인사를 으레 하는 말로 여긴다. 비가 오는 데도 좋은 아침, 인사하듯이. 좀 심하게 말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진심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다 말처럼 쉬운 것도 없으니까. 이를테면 ‘부자 되세요’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게 한동안 유행이었다. 돈 한 닢 안주면서 말이다. 역시 말 하는 데는 밑천 안 드니까.
아무튼 그게 잘못은 아니다. 명색이 새해 시작인데 그 정도 말은 해야 한다. 아픈 사람에게 많이 아프니? 물어보는 것처럼. 그렇게들 살아왔다. 좋은 말은 어쨌든 귀에 듣기 좋으니까. 나쁜 말보다는 편하니까.
그런데 올해는 이 뻔한 인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누가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해오면 일단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복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그런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그 사람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 하늘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식으로 공연히 궁리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왕 하는 김에 조금 더 지껄여보자.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이 이를테면 ‘올해는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위장병이나 무좀이 완치되어 행복을 느끼길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타인의 아픔을 공유하고 해법을 모색하며 사람들과 연대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세요’는 어떨까. 턱도 없는 소리일 것이다. 요즘 기준대로 하자면 ‘귀하의 집값이 오르고 최근에 산 주식도 오르고 아들딸 번듯한 곳에 취직 되고 느닷없이 장사가 잘되시라’는 뜻으로 우리는 받아들인다.
섬에 살다가 한 번씩 도시로 나가면, 정말 다들 잘 사는 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으리으리한 아파트 단지, 어마어마한 자동차 행렬. 멋지고 세련된 옷차림, 한집 건너 하나씩 있는 값비싼 커피점(유명 체인점의 커피 값이 뉴욕 한 복판에서는 2,000원 밖에 안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다들 부자로 보인다. 심지어 수도권 외곽 서민들의 곤란한 상황이 뉴스에 나올 때 따져보니 그들 대부분이 전업작가 20년차인 나보다 훨씬 더 부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가난에 절망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당장 밥 먹을 수 있고 월세 10만원짜리 방이지만 몸 눕힐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불안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최고의 상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제를 살리자는 말이 툭하면 나온다. 이 소리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듯 한데 이것도 밑천 안 들기 때문에 그냥 내뱉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란 집안과 농장의 안녕을 꾀하는 것이라고 했다.
봄이다. 봄이 되자 그 동안 우리의 4월과 5월에 일어났던 숱한 비극들이 흰 꽃처럼 가슴 속에서 피어 오른다. 이런 나라의 국민인 우리에게 복은,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비극을 당하지 않는 것, 별 탈 없이 삶이 진행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인성과 보편과 상식을 회복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새해 인사가 불편했던 이유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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