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갈등은 한중일 공동책임이라는 취지로 말해 파문을 일으킨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의 발언에 대해 미 국무부가 “미국의 정책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해명했다. 마리 하프 부대변인은 그제 “셔먼 차관의 발언은 미국 정책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으며 어떤 개인이나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솔직히 일부에서 이번 연설을 특정 지도자를 겨냥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 약간 놀랍다”고도 했다.
과거사에 대한 입장은 일절 밝히지 않은 해명에서 미국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다. 오히려 ‘별 것 아닌 것 갖고 호들갑 떤다’는 식으로 덮으려는 태도에서 미국의 안이하고 편향된 인식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분노와 허탈감을 느낀다.
미국의 이런 자세가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냉혹한 국제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치자. 우리가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정부의 대응이다. 셔먼 차관의 발언 직후 우리 외교부는 “과거를 거울로 삼아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자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논란이 확산되자 “엄중함을 갖고 다루겠다”고 뒤늦게 입장을 바꿨다. 내용이나 어투에서 누가 봐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셔먼 차관의 발언을 우리 외교 당국은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했다가, 여론이 심상치 않자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한 논평을 냈다.
미국이 외교현장에서 한국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은 최근에만도 여러 차례다. 집단적자위권이 한일 간 최대 현안임에도 미국은 2013년 우리 입장은 아랑곳 없이 동북아 안보에 필요하다며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일방적으로 공식 지지했다. 지난해 2월 한국을 방문한 존 케리 국무장관은 “과거사는 뒤로 하고 한일관계를 개선하라” “오바마 방한까지 한일갈등이 두드러져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쏟아내 어안이 벙벙케 했다. 다른 문제지만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을 도ㆍ감청해 전세계가 시끄러울 때도 우리 정부는 수개월이 넘도록 미국 정부로부터 사과는커녕 사실 확인조차 받지 못했다. 우리와 같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독일 프랑스 멕시코 등이 관련자 처벌과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고, 브라질이 예정됐던 국빈방문을 취소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5월9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전승 70주년 기념행사도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불참 압박에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입장 표명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해 하고 있다.
이래서는 한미관계가 건강해질 수 없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이 막중하다 해서 국가적 자존심을 깎는 저자세 외교로는 우리의 이익을 관철시킬 수 없다. 정부의 각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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