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영화학교 한예종 영상원 개교
씨네21ㆍ키노 등 영화저널리즘 개화
'희생' 예상밖 흥행으로 예술영화 붐
"영화계 곳곳 활력 넘친 한 해"

꼭 20년 전인 1995년 3월 2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 문을 열었다. 신입생 모집 공고가 나간 1994년부터 영상세대는 설렜다. 국내 최초의 대학과정 국립영화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에 기대가 높았다. 영상산업이 미래 먹거리라는 생각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 해 46명의 신입생 중엔 훗날 ‘고양이를 부탁해’와 ‘말하는 건축가’ 등을 만든 정재은 감독이 있었다. 정 감독은 95년을 영화인으로서 “최고의 해”로 기억한다.
1995년은 40대 영화팬들이라면 ‘응답하라 1995’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영화적 사건이 잇따른 해였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이 창간됐고 영화월간지 키노와 프리미어도 선보였다. 영화저널리즘이 꽃을 피웠다. 예술영화 붐도 일었다. 옛 소련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이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만 5만명 가량의 관객을 모았다. 같은 해 7월 삼성그룹은 그룹 내 영상사업을 총괄하는 삼성영상사업단을 출범시켰다. 좋은 영화를 감상하며 수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명작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여기저기서 분출되던 일대 전환의 시기였다.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하는 한국 영화산업의 뿌리를 찾아 1995년을 추억해야 하는 이유다.
● 비디오 키드의 탄생
90년대는 비디오의 시대였다. VCR이 혼수품 필수항목이 되었고 동네마다 비디오대여점이 들어섰다. 퇴근길에 비디오를 빌려 밤에 본 뒤 아침에 반납하는 게 대중의 일상이 됐다. 95년 비디오시장 규모만 2,595억원이었다. 어려서부터 텔레비전을 보며 자라난 70년대생들이 특히 비디오에 매료됐다.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고전영화와 제3세계 수작영화들을 비디오로 접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일명 ‘비디오키드’의 탄생이었다.
좋은 영화를 소장해 두고두고 보려는 소비층까지 생겨났다. 95년 예술ㆍ고전영화 비디오 판매 시장규모만 450억원대에 달했다. 비디오로 명작들을 감상하고 영화에 대한 강의를 듣는 일명 ‘비디오테크’도 나타났다. 영화공간1895, 시앙시에, 문화학교서울 등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몰렸다. 이후 한국영화의 수준이 질적으로 크게 높아진 것은 비디오키드를 중심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영화판에 뛰어들면서다. 이들은 영화를 저급한 오락거리가 아닌 고급문화로 탈바꿈시켰다.
영화저널이 젊은 영화세대와 영화산업을 잇는 가교가 됐다. 93년 무가주간지인 영화저널이 창간돼 최대 8만부까지 발행했다. 당시 주간지의 간판이었던 시사저널과 TV가이드를 뛰어넘는 열독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경영 부실로 폐간됐으나 영화저널의 짧은 성공은 씨네21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씨네21 창간호는 4만부나 팔려나가 출판계에 화제를 모았다. 씨네21 창간멤버인 김영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는 “당시 시장조사를 하니 X세대라 불리던 대학생이 대부분이었다”며 “문화를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소비한 이들을 겨냥해 키노와 프리머어도 등장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희생’의 흥행 성공도 영화저널의 등장과 무관치 않다. 김영진 교수는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은 서구에서조차 흥행이 잘 안 되기로 유명하다”며 “‘희생’의 이례적인 서울 흥행기록은 해외에서도 화제였다”고 말했다.
● 영상산업 기대 키운 ‘쥬라기공원’
세계화를 정책 목표로 삼은 김영삼 정부는 영상산업에 주목했다. 94년 대통령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제출한 보고서가 당시 정부의 정책의지를 반영했다. 보고서는 “(할리우드영화) ‘쥬라기공원’은 1년 동안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해 얻을 수 있는 8억3,00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렸다”며 영상산업 진작을 위한 정책 입안을 촉구했다. 마침 영화 탄생(1895)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 영화계가 떠들썩하던 때였다.
정부와 언론은 ‘쥬라기공원’과 국내 자동차산업을 연결 지으며 영상산업에서도 ‘할 수 있다’ 정신이 통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정재은 감독은 “영화 속 살아있는 듯한 공룡을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쥬라기공원’을 통해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엄청난 기대와 환상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쥬라기공원’처럼 막강한 기술과 자본이 결합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로 생겨난 학교가 영상원이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상원 1기 출신인 박지예 CGV아트하우스 극장팀장도 95년 즈음 신문과 방송을 점령했던 ‘쥬라기공원’을 기억한다. “95년은 국내 영화광들에게 매우 특별한 해였다. 영화계 곳곳이 꿈틀거리며 굉장한 활력으로 넘치던 때였다. 한국영화라는 판이 새롭게 갈아엎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던 때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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