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앞에서 멱살잡이가 났다. 늘 다니면서 자주 보던 새치와 야구모자간의 다툼이다. 야구모자는 만물수리 전문이다. 두 사람은 공생한다. 철물점에서 이것저것을 팔다 보면 집수리 할 일도 문의가 들어올 것이다. 잠긴 문을 따는 일, 변기를 뚫고, 언 수도관을 녹이고, 창문에 바람구멍을 막는 일을 야구모자께서 해결한다. 꽤 영리한 상부상조다.
그런데 그 둘의 관계가 오늘, 깨졌다. 새치가 야구모자의 멱살을 쥐고 한 십 미터 가량 떠밀었다. 덩치가 더 좋은 야구모자지만 나잇살에 밀렸다. 새치가 구경꾼들의 기세를 업었는지 야구모자의 배도 때렸다. 의외다! 통상 어른의 싸움이란 배를 들이밀든가, 허리끈을 붙잡든가, 머리를 맞대고 대치하면 그 뿐이다. 간혹 떨어져서 서로의 말을 쏟아 붓다가 탱크처럼 돌진하더라도 역시 주먹을 내지르지 않는 영민함이 있다. 그런데 이 팀은 아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하지만 야구모자는 새치형님을 때리지 않았다. 손목을 잡아 쥐고는 ‘거울을 보라고’만 연신 내뱉었다. 그 말이 궁금했다. 왜 거울을 보라고 하지?
비겁한 말이지만 나 역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처럼 자연의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가령 싸움꾼들의 말이나 행동, 제스처, 시선과 얼굴의 각도, 에너지와 동선만을 관찰한다. 연극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다. 몇 번 끼어들었다가 번거로운 적도 더러 있었고 갈수록 겁도 많이 난다. 대놓고 보기 민망하여 가던 방향을 바꾸면서 관찰을 계속했다. 문득 지나간 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한 동네에서 이사를 하다 보니 나 역시 그 철물점을 자주 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아슬아슬했다. 연유인즉슨, 서로의 영역에 참견이 많았다. 내가 갈 때마다 그랬다. 가령 옷걸이를 만들려고 쇠파이프를 좀 잘라달라고 하면 새치께서 몇 미터, 파이가 얼마나 되는 파이프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 틈을 못 참고 야구모자가 파고든다. 드릴은 있냐, 상하좌우로 고정해 줄 파이프가 더 필요하다, 꺾쇠도 사라, 그러다 보면 돈이 더 먹힌다, 차라리 기성품을 사는 게 싸다. 그리고는 흰머리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말도 서슴없이 뱉는다. “그 파이프는 얇아서 휘지 형님~.”
다시 가면 또 다른 사단이 난다. 창문에 비닐을 대서 막으려고 한다면 새치께서 요즘에는 시트로 붙이기 좋은 게 나온다고 나서고, 아니나 다를까 문풍지를 바라보는 두 분의 관점도 상대를 따라서 달라진다. 화장실이 막혔다고 뚫어달라고 야구모자를 찾으면, 새치께서는 그냥 마트에서 파는 거 두 세 통 부으면 된다고 친절히 한 말씀 넣어주신다. 그러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는 앙숙이다, 이 두 양반!
거울을 보라고! 얼굴이 창백해진 야구모자가 던진 절규. 모르긴 몰라도 새치형님께서 야구모자에게 먼저 한 방을 날리셨을 것이다. “자식아, 네가 철물점을 알아?” 야구모자도 질세라, “형님이 만물수리를 알아?”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영역을 지키려고 자존심을 건 싸움을 시작했을 것이다. 야구모자가 거울을 보라고 했던 말은 은유다. 유리에 아말감을 바른 그 거울이 아니다. 내 얼굴에서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라는 말이다.
동물도 영역싸움에서는 짝짓기만큼이나 치열하다. 다만 동물은 살기 위해서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 그 때는 목숨을 걸기 일쑤다. 우리는 사람이라 목숨까지는 걸지 않아도 된다. 지혜롭게 공존할 수 있다. 말을 덜하고, 하더라도 너무 파고들지 않으면 된다. 먼저 멈추고 배려하면 무난해진다. 과연, 새치와 야구모자께서 초심을 찾아 공생의 해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맞았으나 때리지 않은 야구모자를 보면서 화해의 가능성을 점쳐본다. 머지않아 또 다시 공존은 시작되리라.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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