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옛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마당에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1주년 기념식 및 기념강연이 열렸다. 그런데 작년 3월 1일 같은 자리에서 출범한 이 단체는 국가보훈처로부터 사단법인 인가가 거부되었다. 놀랍게도 해방 70여년이 되도록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사업회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보훈처가 할 일을 대신 해주어 고맙다고 큰 절이라도 받아야 할 판에 인가 거부라니 어이가 없다.
눈보라가 간간이 날리는 야외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3·1혁명의 정명(正名)찾기와 여성독립운동’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 맞다는 내용이었다. 필자도 그간 ‘3·1운동’으로 표기한 적이 적지 않았기에 공감 가는 바가 있어 자료를 좀 찾아보았다.
일제는 이 독립만세시위를 폭동, 소요 등으로 표현했지만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어땠을까? 1922년 3월 1일 일제의 상해 총영사 후나쓰는 외무차관 우치다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위 독립기념일 축하회에 관한 건’이라는 기밀보고를 하는데, 상해에 사는 한인들이 매년 3월 1일이면 ‘독립만세기념일’ 행사를 한다는 보고였다. 그 해 3월 1일 오후 두 시에도 상해 영국 조계지인 서장로(西藏路) 영파회관(寧波會館)에서 ‘독립기념축하회 겸 연설회’가 열렸는데, 회관 양쪽에서 ‘3·1혁명’이라고 크게 쓴 선전물을 배부했다는 것이다. 상해의 3ㆍ1청년구락부에서 1922년 발간한 기관지의 제목도 ‘3·1혁명’이었다.
미국 교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44년 중경에서 재창간한 ‘독립신문’ 대한민국 25년(1944) 6월 1일자는 미국 ‘신한민보’ 소식을 전하고 있다. 미국 오클랜드의 유일한 한국 교포 주영환씨가 3월 1일 친구인 하터 시장을 비롯해 각계의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주씨가 ‘독립선언서’를 읽고 3·1혁명을 보고했다”며 ‘혁명’이라고 불렀다. 하터 시장이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에게 빨리 한국 임시정부 승인, 한국 독립운동 적극 원조를 요청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해방 후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3월 1일 보신각 앞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제27회 독립선언기념식’이 열렸는데, 백범 김구는 “이 날은 세계 혁명운동사상에 찬연히 빛나고 있는 우리의 가장 큰 국경일”이라면서 “인류의 혁명사상에 감히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거듭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4일자는 “28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의 혁명운동기념일을 전국적으로 의의 있게 거행하기 위해서 삼일기념준비회가 결성되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22일자에는 이날을 ‘성절(聖節) 3월 1일’이라고 표현하면서 26일 시내 안국동 시천(侍天)교회 안에서 ‘3·1혁명 기념 학생궐기대회’를 개최한다고 전했다.
원래 ‘3·1혁명’은 헌법 전문에도 들어갈 예정이었다. 유진오 박사의 헌법 초안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한국인민은 3·1혁명의 위대한 발자취와 거룩한 희생을 추억하며 불굴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자료 대한민국사’ 7권)라고 ‘3·1혁명’을 헌법 전문에 넣었다. 1948년 6월 27일 제18차 국회본회의에서 헌위(憲委)위원장 서상일 의원과 헌위 전문위원 유진오 박사는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 의의와 근거를 묻는 의원들을 향해 “3·1혁명 이래 해외에서까지 이 대한을 써왔다”라고 말했다. 1948년 6월 29일 제20차 국회본회의 토론에서도 제헌의원 서용길은 “우리는 3·1혁명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 했고, 진헌식 의원도 ‘3·1혁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자유신문’ 1948년 7월 9일자에 따르면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야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수정되었다. 초안의 ‘한국인민’이 ‘대한국민’으로, ‘3·1혁명’이 ‘기미 3·1운동’이라는 가치중립적 용어로 바뀌었다.
‘3·1운동’은 ‘March First movement’ 등으로 번역되는데,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March First sports’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는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인가를 거부한 보훈처의 사례에서 보듯 이름과 실상이 다른 경우가 많아 일어난다. 논어 ‘자로(子路)’편에서 공자는 정치를 하게 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느냐는 자로의 질문에 “이름을 바로 잡겠다(正名)”라고 답했다. 이름을 바로 잡아야 다른 모든 것이 바로 선다는 뜻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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