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정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다. 지난 주 국회의 대정부 질문은 개헌 요구로 시작됐다. 이재오 의원과 이해찬 의원 등은 헌법에 규정된 제왕적 대통령제를 중임제 및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고 여야 국회의원 155명도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국민의 기본권 규정 부분과 입법?사법?행정 등 통치구조 부분이다. 제10조부터 제39조까지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규정되어 있고 제40조부터 제127조까지는 통치기구 등 국가운영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통치구조와 관련된 조항이 기본권 조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이 때문인지 지금까지 개헌 논의는 주로 통치 구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개헌 또한 대통령 임기 및 권한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 헌법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치구조 개편만을 추구하는 개헌은 반쪽에 불과하다. 근대 헌법의 모태가 되었다고 평가 받는 영국의 권리장전(1689년)은 ‘신민(臣民)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계승을 정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의 보장, 언론의 자유 등 전반적으로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프랑스 인권선언(1789) 또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시작하며 총 17개 조항에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최근 헌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한 다른 나라들은 통치구조 대신 인간의 존엄성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독일은 1996년 기본법을 개정하며 제1조를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기구의 의무다”로 시작했다. 같은 해 제정된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간의 존엄성, 평등의 실현, 인권과 자유의 증진 실현…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반면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며 국가 체계를 규정하고 있을 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출발점이 다르다 보니 기본권 조항의 분량이나 그 구체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스위스 연방 헌법은 35개 조항에서 1만4,000자 분량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명시하고 있다. 남아공 헌법은 33개 조항 3만2,000자, 독일 기본법은 19개 조항 2만여자로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반면 우리 헌법 중 기본권 조항은 6,000여자에 불과하다. 스위스 등의 헌법에 비해 기본권 부분이 크게 부족한 것이다.
문제는 헌법에 추상적으로 명시된 기본권의 경우 그 침해에 대한 구제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기본권이 중심이 되고 그 내용이 상세하게 규정된 헌법은 실제 기본권 침해가 발생했을 때 국민을 보호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남아공은 2002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예방약을 일부 산모에게만 제공했고 이 정책의 위헌성이 문제가 됐다.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명시된 보건권 침해를 이유로 정부 정책에 대해 위헌을 선언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남아공 헌법 제27조 “모든 국민은 생식 보건을 위한 보건 서비스, 충분한 음식과 물, 적정한 사회부조를 포함한 사회보장에 접근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가용 자원의 범위 내에서 이러한 권리들을 점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입법 조치 및 기타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조항을 언급했다. 헌법학자들은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간단히 규정한 우리 헌법 체계 하에서는 위와 같은 위헌 판단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통치구조에 대한 개헌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헌법이 당초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제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통치구조에 앞서 기본권 보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 보장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헌법을 기대한다.
허윤 법무법인 예율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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