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등에’(Gadfly)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등에는 우둔한 소의 등에서 피를 빨아먹는 쇠파리다. 따끔한 일침을 놓는 등에를 쫓아내기 위해 소는 끊임없이 꼬리를 철썩 대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사회를 각성시키는 성가신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 했음이다. 정치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고, 젊은이들이 따랐다. 결국 선동과 타락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는 법정에 서게 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귀족의 지배 질서를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이기에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친구의 탈출 권고를 거부하고 사형을 받아들인 데 대해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다수가 지배하는 법정에서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었던 철학자의 절망적 선택이라고 했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대검 형사부장을 지냈던 김원치 변호사가 자전적 에세이인 법과 인생에서 ‘미스터 쓴소리’조순형 전 민주당 의원을 ‘등에’로 표현했기에 그 연원을 찾아보니 소크라테스까지 닿아 있다. 김 변호사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탄핵정국 속에 치러진 2004년 4ㆍ15 총선에서 이를 주도하다 낙선한 조 전 의원에 대해 “법사위 국정감사장에서 검사를 상대로 아픈 곳을 날카롭게 찔러대던 한 사람의 등에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현실이 그 무엇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됐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국가적인 손해”라고 하면서 그의 지조와 소신, 그리고 정권과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일갈했던 특유의 쓴소리에 존경의 염을 표현했다.
비판적이라고 해서 다 등에가 될 수는 없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용기와 불퇴전(不退轉)의 기개가 있어야겠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본질, 이면을 꿰뚫는 통찰도 있어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때 등에적인 가치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수레를 막아서는 사마귀의 만용과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고독한 전사,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등에의 숙명을 짊어진 이가 어느 사회나 조직에나 한 둘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정치권을 들여다보면 조 전 의원과 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과 노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 ‘386 탄돌이’로 국회에 입성했던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이 떠오른다. 이 의원은 당 내에서도 공인된 여당 내 야당이다. 이완구 총리는 원내대표 시절 이 의원의 쓴소리에 “이 의원께서 원내대표 시절에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더니”라며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지도부가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원로 대접 차원이 아니다. 이 의원의 여권 비판을 주기적으로 다루는 언론도 구미에 맞아서만은 아니다. 여권이 말하지 않는, 애써 외면하는 다른 면을 제시하고, 현란한 고사 인용에다 정곡을 찌르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정청래 의원이 최근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의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히틀러, 천황 참배에 비유해 정치권과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았지만, 가치관에 따라 반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표현의 적합성이 문제였을 뿐이다. 지난해 11월말 2015년도 예산안 심의 당시 여야 원내지도부가 주고받기 식으로 담뱃값 2,000원 인상에 합의하자 안전행정위원회 야당 간사인 정 의원은 “법안소위에 참석하지 않겠다”며 서민증세라는 자신의 반대 소신을 앞세웠다. 국민건강 명분이 무색한 서민용 저가담배 검토라는 말까지 여당 원내대표 입에서 나왔으니 지도부 방침에 따르지 않은 그의 행동을 탓할 수 없다. 야당 의원 성향이 무지개 빛깔인 게 오합지졸로 비치긴 하지만 스스로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일사불란의 대열에 낄 이유가 없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다.
그간 정 의원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행한 막말의 향연은 지면을 채우고도 모자랄 형편이지만 감정과 막말의 포장을 걷어내면 하지 못할 비판도 아니다. 쓴소리 정치인과 막말 정치인도 결국 ‘한 끗’차이다. 말의 품격과 설득의 내공 차이다. 그 한 끗 차이가 사람을 달리 보이게 한다. 등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정진황 기획취재부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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