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공동체학교 개교 20년
김희정 대표 '산적떼 같은…’ 펴내

“한 달만 있다 갈 거에요.”
여관도 요양소도 아닌데, 오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하는 학교가 있다. 자격증을 가진 선생님도 시험도 경쟁도 없고 수업료도 받지 않는다. 원하는 수업만 골라 오전에 듣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산 들 바다를 헤맨다.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보다 농사법을 가르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입학생마다 ‘나는 이렇게 실험적 곳에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결의는 대부분 빈말에 그친단다.
1995년 문을 연 변산공동체학교의 김희정(47) 대표가 신간 ‘산적떼 같은 요놈들, 예쁘다’(보리출판사)를 펴냈다. 책에는 농촌형 비인가 대안학교에서 자연 속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겪어 온 20년의 일상 보람 고민 등이 오롯이 담겼다.

변산공동체학교는 윤구병(72) 전 대표가 95년 설립한 변산공동체에 있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윤 전 대표는 스스로 사직 후 낙향해 농사, 젓갈 효소 술 만들기 등으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세웠다. 공동체에는 20가구 50여명이 살고 있다. 윤 전 대표의 제자이기도 한 김 대표는 일손을 도우러 학교에 왔다가 “눌러 앉았다”고 했다.
지난달 28일 오전 입학식 겸 졸업식을 찾았다. 변산을 등지고 서해를 마주한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자리한 학교로 향하는 비탈진 언덕길 좌우로 짚간, 장독대, 효소실, 도자기실, 장작가마 등이 늘어섰다. 식이 열릴 강당 앞에는 학생들이 키워 추수, 탈곡, 포장한 쌀과 콩 등이 놓였다. 직접 구운 도자기 접시와 찻잔도 가지런히 놓여 손님들을 맞이했다.
입학ㆍ졸업생은 각각 중등부 3명, 6명과 고등부 4명, 5명. 졸업장을 받아 든 임채우(19) 군은 “힘들게 논에서 벼를 베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다”고 했다. 짐짓 농사가 싫은 듯 엄살은 부렸지만 임군을 비롯한 졸업생 2명은 공동체에 남기로 했다. 어엿한 ‘어른식구’로 농사도 짓고 학교에서 도자기 공예를 가르치게 된 것. 이제까지 공동체에 남은 졸업생은 모두 6명이다.
금방 떠나겠다던 아이들을 눌러 앉게 한 것은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는 자연 중심 교육이다. 행사 내내 학생들의 연애사와 특징을 줄줄 꿰는 진행으로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김 대표는 학생들에게 희정아저씨, 희정삼촌, 희정언니로 불린다.
그는 “처음부터 농촌의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언니 오빠가 수업을 하다 보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쓰지 않게 됐다” 며 “호미나 짚단을 들고 종일 함께 일하다 보면 아이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바쁜 일과로 얼굴 마주 보기도 어려운 도시에서와 달리 이들의 수다 주제는 선거 연예인 연애고민 등을 망라한다.
수업은 글쓰기, 역사, 짚풀공예, 풍물, 연극, 미술, 도자기, 태껸 등으로 영어나 수학 등은 배우고 싶은 학생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직접 공부한다. 그 외에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모내고 밭을 매고 집을 짓는 가운데 아이 스스로 성장하게 돕는다. 학생들의 입학 배경도 ▦아이가 자연에서 뛰놀길 희망한 부모의 권유로 ▦새장처럼 답답하다며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다 ▦난폭한 행동을 일삼다 초등학교에서 쫓겨나서 등으로 다양하다.
2013년 학교를 찾았던 상우(가명)는 게임중독으로 결석을 반복하다 지인의 소개로 이 학교를 찾았다.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 홀로 힘겹게 상우를 키워왔다. 입학 후 한동안은 걸핏하면 읍내 PC방으로 탈출하길 반복했던 상우는 친구들과 농사, 게임, 농구를 하며 몰라보게 달라졌다. 모니터 바깥 세상의 즐거움을 이제야 만끽하게 된 것이다.
김 대표가 이앙기 등 흔한 농기계도 쓰지 않고 ‘사서 고생하는 농사법’을 고집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도시나 정규 학교에서 상처투성이 몸과 마음을 안고 공동체를 찾아온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며 “아이들이 손에 컴퓨터나 손전화 대신 낫과 호미를 들게 해 죽어가는 감각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의 최근 고민은 대학과정 신설에 관한 것이다. 졸업 후에도 공동체에 남으려는 학생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비 한푼 받지 않고 농사로 자급자족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쉽지 않은 계획이다. 김 대표는 “젊은 친구들이 농촌에서 함께 꿈을 찾겠다고 하니 든든하면서도 더 많은 공부를 시킬 여건을 차차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당장 올해부터는 초중고 과정에 수영과 인문학 수업을 추가한다. 수영은 제 앞가림 하는 사람, 농사꾼이 되려면 우선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신설했다. 인문학 수업은 인문공동체 수유너머의 도움으로 진행한다.
“올해 교육 목표는 ‘생각하는 농부가 되자’는 것입니다.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건강한 아이들이 자기철학까지 가진다면 농촌에는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변산=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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