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장고를 거듭한 끝에 어제 청와대비서실장에 이병기 국정원장을 깜짝 내정했다. 그간 청와대 안팎에서 거론되던 후보군 10여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의외의 발탁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원로자문그룹의 한 명으로, 결국 자신에게 친숙하고 편한 인물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국민이 열망한 인적 쇄신의 마무리 카드로는 크게 미흡해 보인다. 더구나 이완구 국무총리가 국회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는 바람에 후임 청와대비서실장 인선에 대한 기대치가 한층 높아진 상황이었다. 기대했던 국민들의 실망이 작지 않을 것 같다.
임명된 지 8개월밖에 되지 않은 국정원장으로 돌려 막기를 한 모양새도 매우 사납다. 정보기관 수장이 곧바로 청와대비서실장으로 이동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 정권이 가용할 수 있는 인재 풀이 그만큼 빈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기도 하다. 야당에서 “국민 소통과는 거리가 먼 숨막히는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충분히 나올 만하다. 바로 얼마 전 임명한 대통령 사회문화특보를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전환한 것이나 친박 정치인들로만 정무특보단을 꾸린 것 등도 회전문 인사, 코드 인사의 연장선에 있다.
어쨌든 신임 청와대비서실장의 임무와 역할은 막중하다. 흐트러진 청와대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은 물론, 박근혜 정부의 최대 약점으로 꼽혀왔던 소통문제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민경욱 청와대대변인은 어제 이 비서실장의 발탁 배경을 설명하면서 “정무능력과 리더십을 갖춰 대통령을 원활히 보좌하고, 국민과 청와대 사이의 소통의 길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외교관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치권과 청와대 등의 주요 직책을 넘나들며 경력과 인맥을 쌓아온 것에 비춰 그런 기대는 일리가 있다. 특히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및 유승민 원내대표와는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시절 이회창 총재체제에서 호흡을 맞춰 함께 일한 사이다. 적어도 당ㆍ청 소통에서만큼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야당 및 국민과의 소통이나 비선 실세 논란을 불렀던 불투명한 국정운영은 또 다른 문제이다. 박 대통령이 신임 비서실장 체제에서도 이전처럼 공식적인 라인을 통하지 않고 주요 정책이나 인사 문제를 결정한다면 비서실장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꼽히는 이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호흡을 잘 맞추면서도 공식라인과 절차를 통해 비서실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못하면 이전처럼 청와대 기강이 잡히지 않을 게 뻔하고 또 한 사람의 ‘김기춘’이 되기 십상이다.
현실적으로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국민의 높은 눈 높이를 충족하는 인물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박 대통령이 청와대비서실장 인선을 차일피일 늦추며 고심을 거듭하는 것을 지켜보면서‘수첩’의 자기 사람 범위를 넘어 폭넓게 인재를 구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이번 인선은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신중하고 정무감각을 갖춘 이 비서실장이 대통령만 바라보지 않고 국민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대통령을 보좌한다면 의외의 성과를 거두지 말란 법이 없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먼저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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