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이 토모아키 지음ㆍ홍이표 옮김
한울 발행ㆍ376쪽ㆍ3만3,000원
기존의 사상사 연구는
편집자 빠져나간 반쪽짜리 연구
일반 독자와 사상가 이어 준 그들은
사상의 산실이자 지식의 프로모터
1961년 11월 19일 영국의 한 레코드점 주인인 브라이언 새뮤얼 엡스타인은 리버풀 변두리에 위치한 캐번 클럽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기엔 촌스런 옷을 입고 담배를 피워대며 노래를 부르는 네 명의 불한당이 있었다. 엡스타인은 즉시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한 달 만에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전설의 로큰롤 밴드 ‘비틀스’ 신화의 시작이었다.
비틀스의 재능을 알아챈 엡스타인의 사례는 ‘기획자’의 중요성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된다. 그가 없이도 비틀스는 유명해졌겠지만 어찌됐든 지금 대중이 알고 듣는 비틀스의 노래는 ‘엡스타인의 비틀스’임에 틀림 없다.
‘엡스타인의 비틀스’가 가능하기 위해선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고도의 정보화 사회란 배경이다. 온갖 종류의 문화와 사상, 예술 콘텐츠가 쏟아지는 사회에서는 그 중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 세상에 내보내는 중간 도매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두 번째는 기획자의 안목이다. 시대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 대중의 욕구와 그 이상의 것까지 채워주는 비상함이 비틀스를 탄생시킨 동력이다.
‘기획자’의 조건과 역할을 그대로 출판계로 옮겨 온다면 기획자는 편집자라는 단어로 바뀐다. 독일어로 편집자를 뜻하는 페어라거(Verlager)의 어원은 흥미롭게도 ‘도매업자’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페어라거는 직물공업이나 제지공업 분야에서 자금 조달, 원자재 파악, 생산자 및 운수 경로 확보, 소매업자와 점주 물색 등 상품의 탄생을 위해 전방위에서 활약했다. “새로운 상품을 낳는 창조자” 역할을 했던 페어라거란 명칭은 공교롭게도 출판계의 용어로 남았다.
후카이 토모아키 긴죠가쿠인대 교수의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편집자라는 프레임으로 20세기 전후의 독일 신학 사상사를 재구성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독일 사회는 불안정한 화학물질 같았다. 1914년 유럽 민족주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1차세계대전이 터졌고 이는 제정 붕괴라는 거대한 변화로 이어졌다. 문화?예술?학문 전반에 ‘부정, 파괴, 해체’의 기조가 흘러 넘쳤고 이는 신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시에 출판계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과거 ‘대중에게 어떤 책을 내놓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온전히 국가와 교회의 몫이었다면 19세기 들어 권위가 무너지면서 출판사에게로 그 권리가 넘어간 것이다. 사상과 학문의 홍수 속에서 출판사는 어떤 책을 발행할지, 누구에게 무엇을, 왜 쓰게 할지 등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처음으로 ‘사상의 도매상’인 편집자가 등장한다.
저자가 이 시기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근대 사상사 연구는 ‘저자-편집자-독자’의 세 변이 이루는 삼각형에서 한 변(편집자)이 빠져나간 반 쪽짜리 연구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신학사상의 연구는 천재적이거나 카리스마적인 어느 한 사상가의 업적만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제작하여 세상에 내보낸 출판사, 특히 편집자와의 관계로까지 관심과 연구가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 신학사가 파울 틸리히의 ‘조직 신학’이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통해 이 시기를 읽는다면 저자는 이 책들을 세상에 나오게 한 편집자 오이겐 디더리히스에 주목한다. 1896년 창설된 디더리히스의 출판사는 기존의 신학 전문 출판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판덴회크 운트 루프레히트, 베텔스만 등의 출판사가 대학이나 교회의 인쇄 하청업체에 머물렀던 것에 반해 디더리히스사는 편집자의 철학을 전파하기 위한 일종의 기지였다. 디더리히스는 근대 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었고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저자들을 발굴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중 한 명이 스위스 벽촌의 목사였던 칼 바르트다.
1차세계대전 중 근대 신학의 한계를 절감한 바르트는 신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 1919년 ‘로마서 강해’를 펴냈다. 그러나 무명의 목사가 쓴 책은 300부도 안 팔린 채 출판사 창고로 들어갔고 그렇게 바르트의 이름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바르트의 소문을 접한, 정확히는 저서 ‘로마서 강해’의 급진적 내용을 접한 디더리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1920년 바르트가 독일을 방문하는 데 여행비의 절반을 댔고 작은 회합에서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바르트는 뮌헨 회합에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동지들, 즉 기존 교회의 노선을 박차고 나온 이들과 조우했고 이들로부터 ‘로마서 강해’의 재고를 전부 사 들일 테니 그것을 독일에서 유통시켜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창고에서 썩어가던 책들은 독일로 옮겨지자마자 매진됐고 1922년 내용을 대폭 수정해 나온 로마서 강해 2판은 이후 변증법 신학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 받게 된다.
디더리히스의 활약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과격하게 기성 교회를 비판한 신학자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을 발굴했고, 종교 개혁을 도모하기 위해 창간된 잡지 ‘디 타트’의 편집과 출판을 도맡았으며, 신구 신학자가 격돌할 수 있는 논쟁의 장을 마련했다. 흥미로운 것은 디더리히스가 사상가보다 더 사상가다운 삶을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입으로 학문의 내용을 해설하거나 비평하는 일은 최대한 피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격변기의 사회에 출판으로 응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어떤 사상과 만나고 무언가를 읽기 이전에, 이미 출판인이 만들고 연출해낸 극장의 무대 앞에 앉혀져 있다는 말이다. 디더리히스는 ‘편집자라는 이름의 사상가’로서 그 무대의 뒤쪽에 서 있었다.”
근대 사상의 흐름보다 편집자의 전능함에 방점을 찍는 저자의 시각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출판사와 편집자의 위치를 돌아보게 만든다. 사상의 산실, 지식의 프로모터, 판의 조종자는 어디에 있는가. 지식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섰던 과거 편집자들의 모습을 통해 저자는 편집자의 존재 의미와 출판의 미래에 고요히 질문을 던진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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