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 무어헤드 지음ㆍ한우리 옮김
현실문화 발행ㆍ536쪽ㆍ1만8,000원
작은 것을 나누고 서로를 지키며
살아 돌아온 40여명의 증언
아우슈비츠의 잊혀진 역사 소환
유럽인들에게 죄의식의 전형으로 꼽히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록은 끝없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그들에게 이 기록을 고통스럽게 읽어내는 것, 그래서 과거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일종의 의식(儀式)처럼 보인다. 이 의식을 반복하며, 의미를 박탈당한 ‘유럽의 배설물’로서의 유대인을 호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만년에 목숨을 끊은 프리모 레비의 소설과 수필에서, 역시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밑천 삼은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3부작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박해받는 유대인’이다.
신간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 안 여자들의 잊혀진 역사를 불러낸다. 이 책의 주인공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체포된 뒤 1943년 ‘죽음의 31000번 수송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살아 돌아온 40여명의 여성들이다.
노예노동보다 시체의 제조가 핵심인 그곳에서 생존은 적극적 저항의 한 형태다. 그녀들은 가능한 한 감시의 눈을 속여 배급품을 훔치고, 작업의 능률을 떨어뜨린다. 르포작가인 캐롤라인 무어헤드가 생존자들의 증언을 엮은 책은 이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로 연대와 운을 꼽는다.
‘여성들은 큰 스튜 냄비와 감방 안에 있던 스토브를 사용해 아침에 먹을 죽을 끓이기 위해 음식이 든 소포를 모두 모아두기로 했다. 나눔은 금세 여자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234쪽)
‘1943년 1월 9일은 다니엘이 서른넷이 되는 날이었다. 같은 감방의 여성들은 꽃 한 다발을 감옥 안으로 밀반입하는 데 성공해 다니엘에게 선물했다.’(261쪽)
여성들은 환자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도록 침상 뒤에 감추고, 서로를 위해 약을 훔쳐내고, 점호 때면 계속 자리를 바꿔 혼자서 칼바람 부는 바깥에 오래 서 있지 않도록 한다. 이 작은 일이 그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과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
극한의 경험을 하고 돌아온 생존 여성들이 회고하는 가장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다시 프랑스에서 적응해야 했던 기간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온 엘린은 고향에서 마련해준 환영파티에서 한 농부로부터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실일 리 없다’는 말을 듣고 사흘을 울고 난 후, 수용소에 관해 말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세상에서 (딸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기 때문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수용소로 간 세실은 3년 후 고향으로 돌아온 후 ‘매우 비참하게 지내고 있던’ 딸과 조우한다.
작가는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여성의 증언’에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수용소에서 겪은 비참한 생활과 이를 견뎌내는 모습은 여성과 남성,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연대’와 여성을 연결한 발상 또한 기존의 통념을 반복한다.
‘모든 증언에는 또 다른 공백이 있다. 증인은 정의상 살아남은 자이며, 그래서 모두가 어느 정도는 특권을 누린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아우슈비츠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복원하는 방법(이 책의 관전 포인트)은 살아남은 그녀들이 끝내 말하지 못한 공백,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찾는 데 있다. 누가 어떤 활동을 왜 했는지조차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다단하게 엮인 40여명의 레지스탕스 활약이 책 절반에 걸쳐 일일이 구술될 필요는 없었을 터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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