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카미 류 지음ㆍ윤성원 옮김
북로드 발행ㆍ376쪽ㆍ1만2,800원
이혼ㆍ실직ㆍ노숙자ㆍ쇼윈도 부부 등
경제침체기 남루한 중ㆍ장년 삶 5편
답 없는 질문 끝 남은 연민과 연대
집요하게 파고든 시선에 공감

일본은 한국 사회의 오래된 미래다. 부동산 버블 붕괴, 조기 실직, 황혼이혼, 가족해체, 세대갈등, 고독사…. 지금 여기서 생겨나는 온갖 사회 병리와 병폐는 이미 거기서 발생한 문제들로, 우리는 장기 침체 시대의 선취된 결말을 참고하고자 자주 일본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엔 해결의 기미라곤 없는 무기력의 미로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무라카미 류(63)의 중편 연작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는 미해결이 시대의 전망인 경제침체기를 살아가는 중ㆍ장년층의 절박한 희망을 노래한 책이다. 살아가는 것이 다만 잃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늙어가는 사람들의 가난하고 불안한 이야기가 물에 풀린 잉크처럼 단숨에 남루한 슬픔을 독자의 가슴에 풀어놓을 때, 5060세대를 겨냥한 흔해빠진 자기계발서 같은 이 책의 제목은 도리어 애잔해진다. 선 굵은 파격과 도발을 추구해왔던 ‘69’의 작가 무라카미 류는 흡사 인터넷 익명게시판의 하소연들처럼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집요하게 서술해가며, 온화하고 잔잔해졌으나 누구보다도 먼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내는 작가로서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다섯 편의 중편은 각각 황혼이혼, 노숙자, 실직과 재취업, 쇼윈도 부부와 반려동물, 노년의 사랑을 다루지만, 50대 이상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문제의 핵심에 경제적 곤란이 자리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의 소설에서 돈은 몇 십엔 단위부터 몇 천엔 단위까지 적나라하고도 세세하게, 시시때때로 거론된다. 그것이 퍽 서글프다. 모든 슬픔의 기저에는 돈이 있다는 것.
처음 사귄 남자와 결혼해 30여 년을 산 후 불현듯 이혼한 ‘결혼상담소’의 주인공은 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하며 버는 월 15만엔으론 노후가 불안해 재혼을 계획하지만, 월 5,400엔의 가입비를 내고 등록한 결혼상담소에서는 돈이 있으면 변태이거나 성격이 좋으면 돈을 노리는 남자들만 소개한다. 그러나 그 너덜너덜한 만남들이 무익하지는 않았다. “혼자 살아가자” 흔쾌히 결심할 수 있게 했으니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니까.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은 시대의 절박에 밀착한 작가의 시선과 태도 때문에 독서가 때때로 고통이 된다. 문학을 전공한 중견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주인공은 54세에 정리해고를 당한 후 파견업체에 등록해 단순노동을 하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곤궁한 삶을 살고 있다. 실직-질병-이혼-가족해체-주거상실-노숙으로 이어지는 프로세스의 첫 단계에 자신이 진입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그는 “사람은 의외로 쉽게 노숙자로 전락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 육체노동으로 인한 허리 통증이 극심해지자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수입이 끊긴다”며 오열하는 그에게 문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쪽방촌에서 죽어가는 중학교 시절의 친구에게 연락이 오고, 그는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충동으로 헛된 여정에 오른다. 돈도 없고 허리도 아픈데 왜 무작정 그를 돕고 있는가. “그것은 분노였다. 무력감에 압도되어 뭔가 소중한 것을 방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분노였다. 분노를 통해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도 없다. 얕잡아 보지 마라!” 노숙자 친구는 죽기 전 어머니에게 “나는 멋진 친구를 두었어요, 그것만으로 산 보람이 있어요”라는 필담을 유언처럼 남겼다. “불안으로 가득 차 있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에겐 미약하나마 희망을 가질 기력이 생겨났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곤궁이 덜한 ‘캠핑카’와 ‘펫로스’의 주인공들은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계화하고 사물화한 부부관계, 가족관계를 적나라하게 묘파한다. 남편의 냄새가 나는 곳에서는 책도 읽어지지 않는 아내까지 묘사해내는 작가의 솜씨는 하루하루의 생활이야말로 삶의 서사를 격변시키는 핵심 원인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소설들은 각각 홍차와 탄산수, 커피, 보이차, 햇차를 핵심 모티프로 반복 변주한다. 삶이 고될 때 인물들은 차를 마신다. 연민과 연대의 표시는 차를 따라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그 물음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라고 적었다. 그 물음에 뾰족한 답 같은 건 없다. 다만 차를 한 찬 나눠 마실 수 있을 뿐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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