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적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면 상징이 필요하다. 국기의 용도다. 그러나 거양된 깃발이 애국심을 거양하진 않는다. 권위주의만 나부낄 뿐이다. 촌스런 권력자 취향이 촌극을 빚는다.
“국기를 신고 다니고, 깔고 앉고, 등으로 뭉개고, 덮고 자고, 찻잔 받침으로 쓴다. 영국인들 이야기다. 유니언기(영국 국기의 공식 명칭)를 잘라 덮은 듯 디자인한 운동화는 흔하고 바닥에 그 모양을 새긴 하이힐도 있다. (…) 양말, 바닥에 까는 러그, 애완견 집에 이르면 불경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 나라에서 그런 게 문제가 됐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다양하고 친숙하게 국기를 즐긴다. 한국의 행정자치부가 3ㆍ1절을 앞두고 태극기 달기 캠페인을 열심히 진행 중이다. 민간 건물에까지 국기 게양을 의무화하려 했으나 ‘법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다’는 다른 부처의 반대로 무산됐다. 오늘(26일) 오후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대대적인 가두 행사도 열린다. (…) 국기 게양이 1988년식 국민운동이 됐다. 영화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 장면에 감명받은 공무원이 많은 것 같다. 우리의 국기는 높은 곳에 걸어 두고 경건하게 우러러봐야 하는 대상이다.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는 높이 35m의 국기봉이 있는데, 국내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것이 학교의 자랑 중 하나다. 이 학교에 가보면 멀리서는 태극기가 보이지만 정작 운동장에서는 고개를 하늘로 젖히지 않으면 보기가 힘들다. (…) 아버지에게 필요한 덕목이 근엄함에서 자상함으로 바뀐 지 꽤 됐다. 태극기도 높은 곳에서 우리 주변으로 내려올 때가 됐다. (…)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이는’ 태극기보다 일상생활에 ‘창조적’으로 스며든 태극기가 더 반갑다.”
-태극기를 꼭 걸어야 하나(중앙일보 ‘분수대’ㆍ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 전문 보기
“영화 관람 후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니까 국기에 경례를 하더라!’는 대통령의 감탄사가 나올 때부터 구체적으로 불길했다. 드디어. 정부가 태극기 달기 운동 관련 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란다. 정부의 지원책, 동원책, 계몽책은 전방위적이다. (…) 아주 오래전, 대통령이 ‘국기를 존중하는 일이 바로 애국이며 우리는 국기를 통해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지금처럼 정부는 곧바로 일사불란한 지침을 하달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해 모든 행사에서 암송하도록 했고, 극장에서는 영화 관람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한 자세로 ‘애국가’가 흐르는 화면을 보도록 했으며, 저녁엔 거리에서 ‘전 국민 차렷! 경례’ 구호 속에 1분 동안 일체의 동작을 멈춘 채 국기 하강식을 거행했다. 애국가가 나올 때 불량한 태도를 보인 이가 즉심에 회부됐고, 어떤 이는 비슷한 이유로 초등학생들로부터 ‘공산당인가 봐’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시절의 일이다. 그런 상황에선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수밖에 없다.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매일 맞고 사는 사람이 누가 손만 들어도 머리를 감싸쥐는 것과 같은 반사적 행동이다. 감동할 일이 아니다. (…) 이 나라에선 나라라는 게 권력자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종속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 (…) 권력자가 마음에 들고 신념을 가진 일이면 그게 최우선이다. 어떤 정권이든 시한부일 따름인데 나라가 가져야 할 기본마저 무시한다. (…) 국민의 윤리와 정신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제정됐다는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될 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393자나 되는 내용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유독 암기력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선생님에게 매타작을 당해가며 그걸 외워야 했다. (…) 그렇게 해서 국민의 애국심이 고양되고 윤리관이 확고해지지 않는다. 광복 70주년의 해이므로 한 집도 빼놓지 않고 태극기를 달아야 하고 그래야 광복의 의미가 확실해진다는 가설은 무개념하다. 권력자의 취향을 강요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 태극기 달기와 관련한 법 개정과 그에 뒤따르는 일사불란한 여러 조치들은 무지한 짓이다. 그걸 보는 국민들 마음이 어떤지 헤아린다면 그렇게 무식한 짓은 못 한다.”
-아는 게 힘이다(2월 24일자 한겨레 ‘이명수의 사람그물’ㆍ‘치유공간 이웃’ 대표) ☞ 전문 보기
핵은 약자의 야심작이다. 우열을 없앤다. 북이 쉽게 포기할 리 없다. 못 쓰게 막아야 한다. 방어 무기도 수단 중 하나다. 문제는 확실한 부작용이다. 중국이 의심한다. 최선은 외교다.
“곧 죽을지 모르는 주제에 남 걱정하는 게 사드(THAADㆍ고고도 미사일 방어)가 중국을 자극한다는 주장이다. (…) TNT 2만t짜리 표준(핵)탄 2~3개면 북한이 60년간 쌓은 재래식 군사력 전부와 맞먹는 위력이라고 한다. 그런 핵무기를 북은 최대 수십개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 북한은 핵 모험 투자로 한반도 군사 지형을 일거에 역전시켰다. (…) 20년 이상을 끌어온 한반도 핵게임은 북이 4차 핵실험과 뾰족한 탄두 모양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동시에 실시하는 날 새 장(章)으로 들어간다. (…) 흔히 핵을 절대무기, 궁극무기라고 한다. 재래식 전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매년 300억달러의 국방비를 쓰면서 이룩해놓은 군사력이 사실상 무력화돼버렸다. 실로 망연자실할 위기다. 그런데 여기에 재래식 첨단 군사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변수 하나가 등장했다. 국방부가 북핵을 킬체인(사전 파괴)과 KAMD(한국형 미사일 방어)로 막겠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 남북 간 거리가 짧은 데다 이동식 미사일 사전 탐지와 발사 후 요격 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술들은 생각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북핵 미사일을 100% 사전 파괴, 중간 요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하지만 북의 입장에서도 죽기 살기의 결단으로 발사한 핵미사일이 요격돼 실패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실패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북도 잘 알고 있다. (…) 미국은 핵에 비핵으로 대응할 수도 있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핵에 핵으로 맞설 수 없는 우리의 희망도 결국 여기에 있다. 한·미가 합의한 북핵 ‘맞춤형 확장 억제’는 미국이 보유한 우주ㆍ해상ㆍ지상의 모든 핵·비핵 억제 자산을 총동원하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고도화되고 있다. (…) 패트리엇 미사일이 처음 등장했을 때 요격 성공률은 9%였다. 지금 최신형 요격 미사일의 성공률은 70~80%에 이른다. 이렇게까지 진보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 요격 성공률이 90%, 95%를 넘어서고 그에 앞선 사전 타격 능력도 배가되면 핵의 군사적ㆍ정치적 절대성은 지금 같을 수 없다. 이렇게 남쪽에 드리울 북핵의 그림자를 줄여나가면 언젠가 예상을 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 북이 한ㆍ미 훈련에 반발하는 것은 맞춤형 확장 억제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 주도의 확장 억제에 안주할 수 없고 우리 역할을 늘려가야 한다. 엄청난 돈이 들지만 국방비 배분의 우선순위 조정 자체가 북에 보내는 메시지가 된다. 북핵 폐기가 어려워진다면 북핵의 효용성을 추락시켜야 한다. 북의 핵위협이 힘을 잃어가는 그만큼 진정한 남북 협상의 여지가 생긴다.”
-‘核 對 非核’ 가능 시대에 대한 자신감(조선일보 기명 칼럼ㆍ양상훈 논설주간) ☞ 전문 보기
“화(禍)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비웃을 때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나라가 그 꼴이 될까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다. 한국 내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배치 문제다. 일부 언론은 사드 배치를 촉구하면서 중국 눈치는 보지 말라는 주장까지 한다. 그러나 그건 무책임하고, 국가경영에 있어 경제가 안보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말이다. 사드는 한 세트에 11조원, 2015년 국방예산 37.5조원의 30% 가까운 액수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이 사드 배치 문제를 처음 제기했는데, 그때 노 정부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사드가 한-중 관계를 해칠 수 있고, 돈이 많이 들고, 성능도 아직 확실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 박근혜 정부로 넘어오자 미국이 사드 문제를 다시 꺼냈다.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미·중 군사력 격차는 5~6년 전에 비해 점점 좁혀지는 반면 미국 국방예산은 계속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미국으로서는 북한 핵과 미사일을 구실 삼아 한국 돈으로 사드를 개발ㆍ배치하고, 그걸로 대중 군사우위를 유지하려는 것 아닌가 싶다. 둘째, 전시작전통제권과 한ㆍ미ㆍ일 군사정보 공유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박근혜 정부의 대미 안보의존성이 강하다고 보고, 그런 여건을 활용하여 사드 배치를 매듭지으려는 것 아닌가 싶다. (…) 시진핑 중국 주석이 이미 작년 7월3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사드 배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작년 11월 26일 추궈훙 주한 중국대사는 국회 간담회에서 사거리가 2000㎞나 되는 사드는 결국 대중국용이라고 지적했고, 창완취안 중국 국방부장이 금년 2월4일 사드 배치에 대해 다시 우려를 표명한 것은 유념해야 할 점이다. (…) 한국 내 사드 배치에 중국 지도자들이 작년부터 수차 우려를 표명한 건 중국이 이미 박근혜 정부의 본심을 읽었고 차후 대응계획까지 세워놨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사드를 대북 방어용이라고 설명하면 중국이 납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진난만한 소리다. 우리가 사드로 중국의 안보이익을 위협하면 중국은 우리의 경제이익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되면 대중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당장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사드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모호성을 유지한답시고 섶을 지고 불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불로 떨어지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선 안 된다(2월 23일자 한겨레 기명 칼럼ㆍ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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