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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어의 꿈 이어 우주의 꿈 품은 다도해의 비단섬...곳곳 복수초 물결

입력
2015.02.2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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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대 삼치 파시 열린 항구

일제 때 금융기관ㆍ우체국 등

고흥군을 먹여살린 부자 섬

지금 나로우주센터로 유명

트레커들에겐 아늑한 포구와

수백년 송림ㆍ봉래산 숲길 인기

전남 고흥 나로도항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근방에서 나는 풍부한 수산물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개발한 항구로 국내 최대 삼치파시가 열렸던 곳이다.
전남 고흥 나로도항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근방에서 나는 풍부한 수산물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개발한 항구로 국내 최대 삼치파시가 열렸던 곳이다.
1910년 세워진 나로도우체국 건물.
1910년 세워진 나로도우체국 건물.
1950년대 국내 처음 세워진 수산물 통조림공장 터. 현재는 굴뚝만 남아 있다.
1950년대 국내 처음 세워진 수산물 통조림공장 터. 현재는 굴뚝만 남아 있다.

봄바람이 제일 먼저 닿는 한반도 남쪽 끄트머리에 큼직한 유자 열매 하나 대롱대롱 매달린 듯한 모양의 땅덩어리가 있다. 전남의 고흥반도다. 이 고흥반도에 딸려있는 섬 외나로도는 지금 이미 봄이 한가득이다. 따뜻한 볕에 노곤해진 땅에선 초록의 순들이 쑥쑥 올라오고 있다. 복수초의 대규모 자생 군락지인 외나로도 봉래산(410m)에는 노란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다른 곳보다 먼저 봄을 맞는 이 외진 섬은 몇 해 전 나로우주센터가 들어서면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섬의 이름 ‘나로’는 이곳 해안을 지나던 중국 상인들이 서답(빨래)바위를 보고 바람에 날리는 오래된 비단 같다고 묘사해 붙여졌다는 유래가 있다. 또 군용이나 관청에서 쓰이는 말들을 나라에 바치는 섬이라는 뜻에서 나라섬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바뀌면서 나로도(羅老島)로 개칭됐다고도 전해진다.

면적이 여의도의 약 6배쯤 되는 나로도는 육지 쪽의 동일면 내나로도와 바깥쪽의 봉래면 외나로도로 이뤄져 있다. 지금은 육지와 내나로도를 연결하는 연륙교(나로1대교),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잇는 연도교(나로2대교)가 1994년과 1995년 놓이면서 교통이 편리해졌다.

우주센터가 있는 외나로도는 섬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할 만큼 절경을 품고 있다. 해안가를 돌면 기암괴석과 백사장을 둘러싼 해변 솔숲, 작고 아늑한 포구, 한가로이 정박한 통통배들을 만날 수 있다. 나로우주해수욕장은 수 백년 된 송림과 어우러진 고운 백사장으로 아늑한 운치를 자랑하고 봉래산의 거대한 편백ㆍ삼나무 숲길은 사철 청청함을 만끽하기 위해 트레커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사실 외나로도는 우주센터가 들어오기 한 세기 전 도회지 못지 않은 흥청거림이 있던 곳이었다. 외나로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로도항(축정항)은 삼치파시로 유명했다. 이곳의 삼치파시는 전국 최대 규모였고 하루 최대 조업 어선이 500척을 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전기와 수돗물이 들어갈 정도로 부자 마을이었다. 고흥군 세수의 3분의 1을 이 섬이 충당했다고 한다.

외나로도 앞바다는 삼치뿐 아니라 새우와 장어 등 수산물이 풍부했고, 그 수산물이 부른 부가 흘러 넘쳤다. 그 돈 냄새를 맡고 일본인들이 몰려들면서 1910년에 이미 전국에 몇 개 없던 우체국이 설치됐고 나로도항 중심도로엔 당시 최첨단 건설공법인 시멘트포장이 이뤄졌다. 1930년대 마을에 발생했던 화재로 의용소방대가 설치됐고 항구 중심에는 행정·금융기관, 지서, 대중목욕탕이 세워졌다.

일제는 외나로도를 수산물 전초항구로 만들기 위해 이곳에 주거와 기반시설을 조성했다. 나름 계획도시를 세운 것이다. 항구 주위에는 수산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제빙공장을 지어 나로도 앞바다와 인근 거문도 완도 등 남해안은 물론 서해안에서 잡힌 고기도 싣고 와 이곳에 보관했다.

물동량이 늘자 배를 건조하는 조선소가 들어섰고 멸치 등을 이용한 가공공장이 지어졌다.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인 집성촌이 생겨났고 항구에서 지서까지 약 800m의 중심도로 양쪽에는 적산가옥이 즐비했다. 나로도항은 수탈한 수산물을 일본 본국으로 보내는 창구로 이용됐으며 항구는 더욱 번성하며 넓어졌다.

나로도 신금마을의 명경민(69)씨는 “일제 때 몰려든 일본인들이 땅을 사들이면서 투기지역이 될 만큼 번성했고 70년대까지도 일본인 명의의 땅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지에서도 보기 힘든 화장품과 의류 원단, 머릿기름, 의약품, 면도기 등 다양한 외산 생필품들이 들어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역이 이뤄지던 곳”이라며 “외나로도가 남쪽의 작은 섬에 불과했지만 큰 항구로서 풍요를 누렸다”고 회상했다.

해방 후 나로도항은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침체기를 맞긴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번성을 한동안 이어갔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전국에서 첫 수산물 통조림공장이 생겼고 1965년에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돼 물양장과 부두가 대폭 확충됐다. 수산물 거래가 성황을 이뤘고 고흥의 5대 전통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수산업이 쇠퇴기를 맞으면서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인근 섬을 오가는 여객선 운항 횟수가 줄었고 나로도항을 경유하던 완도-부산 정기 여객선도 끊겼다. 그렇게 조금씩 잊혀졌고 섬의 화려했던 영화는 무심한 세월의 더께에 가려졌다.

외나로도가 다시 조명 받은 것은 나로우주센터가 들어서면서부터다. 2009년 봉래면 예내리 하반마을 일대 약 507만㎡의 부지에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기지인 나로우주센터가 조성됐다. 이곳이 우주센터로 선정된 건 2001년 1월이다. 당시 제주 서귀포시, 경남 남해군 등 11곳의 후보지와 열띤 경쟁을 벌인 끝에 발사체 비행영역과 인접지역 안전성, 부지 확보의 용이성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낙점을 받았다.

나로우주센터는 국내에서 자체 기술로 만든 위성 및 발사체를 한국 영토에서 발사하기 위한 기반 시설이다. 우주발사체 발사대, 발사통제동, 조립시험시설, 추적레이더 및 원격자료 수신 장비, 광학 추적 장비, 비행종단지령장비, 추진기관시험동, 기상관측소 등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선 지난 2013년 1월 30일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Ⅰ)가 쏘아 올려졌고, 우리나라는 자국 발사대에서 쏘아 올려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킨 스페이스(우주) 클럽에 11번째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고흥군은 나로도 주변 지역을 우주항공 중심도시로 건설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우주항공산업, 우주휴양산업, 인프라 구축, 신재생산업 등 29개 사업에 총 2조3,85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나로우주센터, 고흥항공센터, 우주과학관, 청소년우주센터, 우주발사전망대, 우주천문과학관 등 5,447억원을 들여 9개 사업을 완료했다. 나로우주센터 2단계 발사장은 2019년까지 사업을 마무리하고 한국형 발사체 시험장과 고흥우주랜드, 고흥로켓센터 등 10개 사업은 현재 추진 중이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달 탐사선, 우주테마파크, 우주부품시험평가센터 등 10개 사업은 계속 추진할 방침이다.

고흥군 관계자는 “고흥을 우주항공 중심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관련 사업을 발굴하고 내실 있게 추진하겠다”며 “우주항공 관련 시설들이 들어서면 나로도에 대한 인지도는 물론 국내외 관광객 유입도 늘어 지역경제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나로호 발사에 성공한 외나로도는 미래 우주시대를 개척하기 위한 우주개발의 전초기지이자 대한민국의 꿈과 희망이 발사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과거 파시의 영광을 누렸던 고흥반도 최남단 끝자락 외딴 섬 외나로도. 이제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우주항공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다.

고흥=하태민기자 ham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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