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후배가 있다. 그가 어학원엘 다닌다고 하더니 그새 학원에 같이 수업을 듣는 한 여자가 맘에 든단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에게 물어온다. ‘뭘 어떻게 해?’ 하는 표정으로 후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서로 마주칠 기회는 있냐고 묻는다. 후배는 한 시간 반 수업이 끝나면 20분간 쉬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 마주칠 기회가 있단다. 나는 사과 하나를 준비해서 그랑 나눠 먹으라고 했다. 사과를 먹을 때 반으로 쪼개서 나누라고도 했다. 쪼개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사과에 슬쩍 칼집을 내서 가라고도 했다. 그 두 사람은 연애를 하더니 결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살면서 세상에 보탬에 되는 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서 그나마 좋은 일은 한 적은 언제였는지 자문했더니 문득 이 일화가 떠올랐다. 여기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여 본다.
한 층에 세 가구가 살았다. 내 옆집에는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우다 보면 옆집 청년이 내는 생활소음들이 잘 들렸는데, 이를테면 청년의 직업은 병원의 간호사이며 그러므로 집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일정치 않으며 연애를 못해서 안달이 났으며 얼마 안 있어 일을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시작하려고 도모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정보는 단순히 베란다에 나가 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귀에 들려오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한 처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 여성은 다름 아닌 바로 내 옆방에 사는 여성으로 베란다에서 바깥을 보고 선 것을 기준으로 치면 왼쪽으로는 청년이, 오른쪽으로는 처자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 살면서 죽은 듯이 지냈는데 죽어 지낼수록 양 옆집에서 들리는 생활소음을 엿듣는 재미가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재미’라고 쓰긴 했지만 ‘영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읽어줬음 좋겠다.
아무튼 그렇게 숨 죽여 살던 중에 어쩌다 왼쪽의 청년과 복도에서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베란다에서 몸을 바깥으로 한껏 빼면 얼굴을 보여줄 수도 있었으므로 베란다에서 서로 담배를 빌려주고 갚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청년이 나에게 오른쪽 처자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닌 형편이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일러바쳤다. 그러다 나는 그만 어떤 영감이 떠오르는 바람에 이러고 만 것이다.
“집에 초가 없는 거 같더라고요. 어젯밤에 잠깐 정전되었잖아요. 되게 당황하고 무서워하던데….” 그 밤 나는, 정전이 된 틈을 타 베란다로 나가 성냥을 그어 담배를 물고 있었고 마침 오른쪽 처자 역시도 베란다로 나와 바깥을 살피며 어딘가로 전화를 해서는 초 타령을 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청년이 처자에게 초를 선물한 모양이었다. 초를 선물하고는 나에게 고맙다며 둘이 잘 될 것 같다고 했다.
고맙기는. 그게 내가 한 일인가. 영감(靈感)님이 시킨 일이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나 되는 일이 없을 때 시인이 하는 일은 영감을 부르는 일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거나,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마땅히 그래야겠는’ 일들이 덮칠 때, 영감은 이런 저런 일들을 지시하고 시킨다. 때로는 그 영감을 다른 곳에 쓰는 일도 있다. 종이 위에 쓰지 않고 앞서 말한 대로 사람 관계에 쓰는 경우가 그것이다.
하지만 영감이라고 해서 늘 100%의 선명함으로 들이닥치지는 않는다. 명중은커녕 꽂히지 못할 때도 많거니와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속도를 잃고 그만 숨이 죽어버리는 경우, 또 매혹적으로 다가오더라도 내가 그걸 받아낼 수 없는 상태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커다란 일이기도 한 것이 예술 하는 사람의 일이다. 그래서 오던 길을 문득 멈춰 서서 뒤를 한참 돌아다보기도 하고, 불쑥 먹던 밥을 중단하고 신발을 신기도 하며,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한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도 하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탁자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기도 하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이상하게도 그러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급히 바꿔 놓아야 할 세계가 있어서 잠시 파도를 맞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그렇다고 ‘잠시 파도를 맞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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