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연초에 걸쳐 사회를 달군 주제가 ‘증세’다. 그 형태는 이렇게 나타났다. 첫째, 증세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이다. 대표적 예로 세액공제가 증세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정부가 실제로 증세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둘러싼 설왕설래였다. 둘째, 증세 논쟁이 나온 김에 아예 복지 축소의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이다. 재정 건전성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복지제도라면 아예 더 확대되기 전에 포기하자는 주장이다. 셋째, 증세와 복지제도 확대 간 관계 관련 논쟁이다. 한쪽은 복지제도 확대를 위해 증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며 다른 한쪽은 증세 없이 현재보다 복지제도 확대가 가능하다고 맞섰다. 이러한 논쟁들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자.
먼저 명목이 소득공제든 세액공제든 같은 소득을 근거로 예전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됐다면 이 또한 증세이다. 청와대 참모와 관료들의 현란한 말솜씨와 관계없이 납세자들은 그렇게 인식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전형적 예였다. 다만 이제 과거와 비교할 때 적지 않은 납세자들이 증세로 마련한 재원으로 복지제도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증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조세정의 확립 차원에서 세액공제의 필요성, 그리고 증세에 상응하는 복지제도 확대 비전을 국가가 납세자에게 설득하는 자세를 보이지 못했다.
둘째, 인구 고령화 등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하여 시간만 지나면 우리나라 복지지출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에 재정 건전성 유지를 위하여 현 복지제도 자체도 축소해야 한다는 ‘파이론’과 ‘낙수효과론’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했다. 마치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인이 되고 소득이 끊겨도 국가가 기초연금으로 그리고 건강보험으로 풍요롭진 않겠지만 웬만한 수준의 노후생활은 보장해 줄 것 같은 신종 사기 버전이다.
유럽의 선진복지국가들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정도 경제성장을 했던 수준에서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 수준을 20% 선으로 유지했다. 그런 국가들은 저출산ㆍ고령화를 이미 오래 전부터 높은 수준에서 경험하고 있으면서 사회복지지출 비중을 현재 약 30%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에서 3%였고,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 10% 수준에 불과하다. 성장의 열매를 제대로 나눈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커지는 파이와 위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감언이설로 국민을 현혹하면서 성장에 따른 공평한 재분배를 시도하지 않았다.
물론 ‘복지 지출의 자연 증가분’ 덕분에 수십 년 뒤 수많은 노인들이 국민기초생활보장에 의존하면서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마냥 커가는 파이와 혹시 위에서 흐를지도 모르는 물에서 기대하는 것은 기초생활수급자로서의 삶이 아니다. 젊어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 ‘열정페이’가 아니라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직장, 낸 세금만큼 사회보장제도로써 돌려주는 국가로 인해 생겨나는 중산층의 여유 있는 삶이다. 국가가 이런 삶을 국민에게 만들어주려면 지금부터 복지제도를 제대로 도입하고 확대해 나가야 한다. 부채주도형 경제성장이 아니라 소득주도형 경제성장,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 구조를 전제로 하는 복지제도를 확대해 가야 한다.
복지제도 확대를 하려면 물론 불가피하게 증세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증세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지속가능 발전을 하는 유럽 복지국가를 보면 조세 정의 확립과 효율적 복지제도 운영은 기본 전제다. 지하경제와 불합리한 세출구조를 그대로 둔 채 성공한 복지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현 정부가 외치는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출구조 조정은 분명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런데 왜 지난 2년 간 구체적인 성과는 보여주지 않고 국민들에게 마냥 증세 없는 복지만 하겠다고 고집하는가. 이 정권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출구조 조정만이라도 잘 해보겠다는 의미라면 이제는 그 성패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이해를 구할 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 정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증세를 통한 복지제도 확대의 장기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박근혜정부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박근혜정부이기 때문이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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