旗는 인간의 열정을 선동하고 자극
청마의 '깃발'은 순결한 세계를 말하지만
그 순정을 세속화한 것은 국가권력
중학생 시절에 작문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야기로 기억한다. 일제강점기에 한 한국인이 대서양이든가 태평양이든가 대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에 타고 있었다. 그는 선장이 베푸는 특별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식탁에 앉은 회식자들 앞에 선장이 일일이 그 출신국가의 작은 국기를 꽂아 주는데, 한국인 앞에 오자 선장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국기는 일본을 자기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 승객을 모욕할 것이며, 태극기는 설령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외교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잠시 고심하던 선장은 그 한국인 승객의 식탁에 작은 백기를 꽂았다.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글을 읽고 어린 나는 울었다.
인간들이 언제부터 기를 만들어 게양하고 깃발을 휘날렸는지에 대해 쓴 글은 읽은 적이 없지만, 그것은 국가가 성립되고 나서도 훨씬 뒤의 일일 것 같다. 건국신화에 국기에 대한 신화가 결합된 예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군이나 주몽이, 또는 혁거세가 깃발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전쟁이 있는 곳마다 깃발이 나부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적어도 선조들이 나라를 세울 때만큼은 인간들의 화평한 삶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근대세계에서 기는 신호기가 아니라면 도시건 국가건 상단이건 군대건 하나의 인격이 된 집단의 존재를 나타낸다. 깃발은 집단의 정신이고, 그 집단에 속한 인간의 긍지이며, 집단 중에서도 지극히 거대한 집단인 국가에 이르러서는 그 상징적 성격이 더욱 강해진다. 그것은 긍지의 표현이기에 존중되어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기에 싸움의 선두에 자리잡는다. 인간의 삶이 한 국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던 시대에 국기는 거기 속한 인간집단들이 내거는 삶의 의지와 목표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 목표는 자주 정복과 연결되고, 그 의지는 투쟁의 의지일 때 가장 확실한 것이 된다. 아문센은 ‘노르웨이 사람으로’ 남극점에 노르웨이의 국기를 세웠으며, 닐 암스트롱은 자신이 달에 딛는 한 걸음이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라고 말하면서도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를 달에 꽂았다. 이럴 때 인간은 정복자가 되기 위해 기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올림픽 같은 국제대회에서 운동선수들이 메달을 목에 걸 때도 그들의 머리 위로 그들이 속한 나라의 국기가 올라간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생명을 부리려는 그 피나는 훈련의 노력은 오직 국가이념에 대한 충성으로만 가능하다는 듯이. 이럴 때는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확인하려는 이 세계적 행사가 인간을 오히려 어떤 분쟁의 집단에 예속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깃발이 있는 곳에는 소속이 있다. 연원도 다르고 뜻도 다른 깃발을 세우는 점쟁이들을 제외한다면 사적인 깃발을 세우는 개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유치환의 ‘깃발’을 읽다 보면 그 깃발이 어떤 집단의 깃발이 아니라 한 개인의 깃발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 시가 수록된 ‘청마시초’는 1939년에 출간되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벌여 북경과 남경을 점령하고, 미국과의 결전을 각오하고 있던 시기다. 그래서 이 시에 영감을 준 깃발은 일본의 일장기였으리라는 생각을 무질러버리기 어렵다. 이 시가 친일시라고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다. 태극기건 삼색기건 일장기건, 기는 국기이기 전에 기다. 비록 적진의 기라고 하더라도 기는 이루거나 이루지 못할 인간의 한 열정을 저 높은 곳에서 펄럭이며 선동하고 자극한다. 그 깃발이 제 나라의 깃발이 아니라 일본의 깃발이었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이 시에 특별히 국가 이념의 표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은 없다. 시 전체에서 집단을 나타내는 단어는 ‘아우성’ 하나뿐이다. 그것도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내면화되어 있기에 국수적 프로파간다나 전쟁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영원한 노스탈쟈”라는 말은 인간성의 불멸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억 저편에 있는 어떤 순결한 세계에 관해서도 말한다. 그에 대한 “순정”을 기껏해야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머물게 한 것은 지상의 중력이고, 그것을 세속화한 것은 국가권력이다. 열정은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으로만 남는다. 식민지의 종주국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는 이 순정을 증폭시키지만 또한 착취하고 더럽힌다. “순정”을 “애수”로 간직하기는 집단의 깃발에서 개인의 깃발을 쟁취하는 한 방식이다. 물론 안타까운 방식이다. 이 안타까움이 시에서 구구절절 맑고 곧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과도하게 쓰게 한 것도 사실이다. “저 푸른 해원” “영원한 노스탈쟈” “바람에 나부끼고” “이념의 푯대 끝에”…. 이 아름다운 말들은 열정을 슬픔 속에 녹이고, 이 슬픔은 가다가 돌아선 의지의 알리바이가 된다.
청마보다 약 70년 전에 랭보도 깃발의 시, 그러나 매우 끔찍한 깃발의 시를 썼다. 그의 사후 시집 ‘일뤼미나숑’에 들어 있는 ‘야만인’을 우리말로 옮겨 적는다.
나날과 계절들이, 인간들과 나라들이 멀리 사라진 뒤에,
피 흘리는 고깃덩이의 깃발, 북극의 바다와 꽃들로 짠 비단 위로 펼쳐지고; (바다와 꽃,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영웅심을 고취하는 해묵은 팡파르에서 풀려나― 그 곡조가 아직도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공격하는구나― 옛날의 암살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오! 북극의 바다와 꽃들로 짠 비단 위에 피 흘리는 고깃덩이의 깃발; (바다와 꽃,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감미로움이여!
서리의 돌풍 속에 타오르는 숯불들, ―감미로움이여!― 우리를 위해 영원히 탄화하는 지심(地心)이 내던지는 다이아몬드의 비바람 속에 쏟아지는 불길. ―오 세계여!―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있는, 해묵은 은둔지와 해묵은 불길에서 멀리 떨어져,)
타오르는 숯불과 거품. 음악은, 심연의 소용돌이이며 얼음덩이와 별의 충돌.
오 감미로움이여, 오 세계여, 오 음악이여! 그리고 거기, 형태와 땀과 머리카락과 눈동자들, 떠돌고, ―오 감미로움이여!― 그리고 극지의 화산과 동굴의 밑바닥에 날아든 여자의 음성.
깃발은…
한 세계가 멸망한 뒤에, 그래서 마치 태고처럼 다른 세계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야만인”은 제 가죽으로 깃발을 만들어 저 푸른 바다를 향해 내건다. 청마 식으로 말한다면,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핏덩어리 손수건’이다. 시인은 저 “순정”을 착취하고 세속화한 낡은 문명을 마침내 파괴했지만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 그 문명 속에서 자란 자기 자신이 남은 것이다. 자신이 남아 있는 한은 “바다와 꽃”이라고 하는 세계의 본디 얼굴이 드러날 수 없다. 시인이 자기를 죽여 그 가죽으로 깃발을 만든다는 것은 한 문명이 끝난 자리에서 여전히 그 문명의 잔영에 간섭 받는 자기 자신을 그와 같이 처단한다는 것이다. “영웅심을 고취하는 해묵은 팡파르”, 다시 말해서 인간 정신의 불멸성을 국가주의의 열광으로 변질시켰던 저 낡은 프로파간다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완벽한 자기희생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마침내 “극지의 화산과 동굴의 밑바닥에” 한 “여자의 음성”이 날아들어 낡은 세상이 사라지고 새 세상이 왔다고 말하겠지만, 이미 핏덩어리 깃발이 되어 있는 시인은 그 복음을 듣지 못할 것이다.
이 절망적인 자기 처단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가로막고, 그 두 세계 사이에 온갖 관습의 울타리를 만들었던, 그래서 시인의 순정한 정신을 타락과 무기력 속에서 살게 했던 저 낡은 세상에 대한 복수와 같다.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이번 원고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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