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애호가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한 권의 책 ‘죽이는 책’(책세상)이 번역 출간됐다. 영미권 20개국 119명의 미스터리 작가들이 꼽은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 121편에 대한 비평 선집으로, 1841년작부터 2008년작까지 아우른 이른바 ‘미스터리 명예의 전당’이다. 아서 코난 도일부터 애거서 크리스티, 대실 해밋, 리 차일드, 조르주 심농, 트루먼 커포티, 이언 랜킨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의 고전은 물론이고 풍문으로만 접했던 전설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골고루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미스터리 애독자들을 흥분시키는 이유는 단순히 최고를 모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최고를 주장하는 이가 현재 가장 뛰어난 영미권 미스터리 작가들이란 점이다.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 마이클 코넬리는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추천하지만, 흔히 챈들러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빅 슬립’ 대신 ‘리틀 시스터’를 강권한다. 그는 책의 13장, 그 중에서도 네 쪽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며 “경외감을 느끼기 위해 읽는”다고 말한다. “‘리틀 시스터’는 최상의 레이먼드 챈들러이며, 그의 냉소와 풍자에 있어 최고를 보여준다. 캐릭터와 공간의 본질을 가장 적절하게, 다이아몬드처럼 예리한 기교로 포착한 지점은 소설의 13장이다. (중략)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신봉자다. 나는 13장을 배우는 학생이다. 나는 새 작품에 착수할 때마다 그 부분을 읽는다.”
코넬리 역시 수많은 히트작을 내놨지만 이 책에 언급된 작품은 1992년 쓴 데뷔작 ‘블랙 에코’다. 존 코널리는 코넬리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적 양상_고독한 아웃사이더인 주인공이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싸우는 모습을 저널리즘에 입각한 건조한 문체로 풀어 나가는_이 첫 작품 ‘블랙 에코’에서 이미 완성됐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라스트 코요테’나 ‘엔젤스 플라이트’ 같은 작품들은 ‘블랙 에코’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뷔작에서 코넬리가 이뤄낸 성취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데뷔작에서 기준치를 얼마나 높이 세웠는지를 잘 보여줄 뿐이다.”
대중과 평단이 보지 못했거나 무시한 책들의 진면목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작가들의 모습은 ‘죽이는 책’의 가장 죽이는 대목이다. 그것은 때론 자기현시욕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때론 하드보일드계로부터 폄하당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조지 V 하긴스, 제임스 엘로이, 데릭 레이먼드 등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는 생소한 작가들의 알짜배기 리스트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순문학에 비해 차별 받아온 장르문학은 이렇게 제 위상을 찾는다. 이 책을 공동으로 엮은 존 코널리와 디클런 버크는 ‘범죄소설’이라는 차별적 명칭에 의문을 제기하며 책에 언급된 작품들을 과연 범죄소설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자신만만하게 묻는다. “장르란, 아름다움처럼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범죄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 파괴되지 않는 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며, 범죄 요소를 없앨 경우 무너져버리는 소설이 범죄소설이라는 공식은 꽤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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