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국무총리는 내각제 국가의 총리와는 위상과 정치적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총리도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인준을 득해야 하기 때문에 선출직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절차적 정당성과 역할을 부여 받는다. 장관이 인사청문회 결과와 무관하게 대통령의 권한으로 임명되는 절차와 구별된다.
따라서 절차적으로 총리는 선출직과 임명직의 중간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각을 통할할 권한을 부여 받는다.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안도 행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대 총리들은 정치적 지분이 있는 총리가 아니면 거의 의전(儀典)형, 대독(代讀) 총리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회창 전 총리의 경우 헌법상의 국무위원 제청권 행사 등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불화를 빚었다.
이완구 총리는 인사청문회에서 “쓴소리 못하는 총리는 존재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총리가 된다면 대통령에게 옳은 소리, 쓴소리를 하겠다”고 했다. 또한 ‘청와대가 인사를 다하면 총리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반드시 헌법에서 주어진 총리 권한을 행사할 것이고, 내각을 확실히 총괄하겠다”고 했다. 헌법 86조의 내각 통할권과 국무위원 제청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단서가 있다.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내각을 통할하는 권한을 갖는 것은 우리 헌법의 모순적인 측면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학술적 용어도 아니고 헌법이나 법률 용어도 아닌 ‘책임총리’의 실질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총리 임명 때마다 예외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실세 책임총리라 해도 대통령제에서 총리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면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방향이 차라리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는 헌법 취지에 부합한다.
원천적으로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분산은 이원집정부제의 권력구조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법적·제도적 보완 없이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권력운용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대통령과 총리의 독대를 공개하고 횟수를 늘리는 등 의도적인 힘 실어주기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는 정치공학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대통령의 인식이나 정치적 관행의 변경만으로는 책임총리를 통한 권력 분산은 현실적으로 실행되기 어렵다는 것은 짧은 헌정사가 주는 교훈이다.
우리 사회의 균열축은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지역적 측면 등 다양한 층위에서 형성된다. 정치는 이러한 갈등을 제도권인 정당체계 안에서 관리하고 최소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가 국민에게 불신을 받는 이유는 다양한 레벨에서 분출되는 모순을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일지 모르지만 ‘다시 정치가 문제’라는 명제가 화두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 부처의 정책 혼선과 우선 순위의 조정이 총리실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그러나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도 각 영역에서 자율성과 책임을 가진 ‘책임부총리’를 지향한다면 총리실의 업무조정과 내각의 통할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 또한 ‘쓴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실물정치공간에서 이의 한계도 뚜렷하다. 게다가 인준과정에서 정치환경적 변수에 따라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적극 지원에 힘입은 상황은 ‘쓴소리’의 공간을 상대적으로 제약한다.
그렇다면 선출직 광역단체장을 역임한 정치인 출신 총리의 지향은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의 현장과 균열의 요인을 찾아서 시민들과 소통하며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최대공약수를 찾고, 정치의 기능을 복원하는 것이다. 관료에 비해 정치인이 보유하고 있는 비교우위의 핵심이다. 지역구에서 표심을 쫓아 유권자와 소통하고 지역주민에게 다가가며 본능적으로 민심에 민감한 정치적 감각을 총리직에 최대한 적용해야 한다.
이완구 총리가 전직 총리들처럼 일상적인 정책 조율과 내각의 상징적 수장 역할에 머무른다면 검증과 청문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상처와 흠집을 만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집권 3년 차를 맞는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치유는 정책을 통한 양극화 해소가 기본이 되어야 하지만 정치 복원이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 복원은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도출에 긴요하다. 사회적 합의는 갈등의 조정에서 나온다. 갈등의 현장에 복무하는 총리는 그래서 필요하다. ‘행정’을 하는 총리보다 ‘정치’를 하는 총리의 실험을 지켜볼 일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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