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자 안경환이 “신뢰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가 해법이다”라는 흥미로운 칼럼을 썼다. 내용은 이렇다. 한국이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악마성을 극복하고 세계적 경기 침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중국 시장의 주역이 돼야 한다. 여기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일본이다. 문제는 일본의 극우 정치가 만들어내는 반감에도 불구하고 유커의 일본행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세련된 자본주의 덕분이다.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 정직과 믿음”같은 사회적 신뢰가 있다. 우리가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중국 시장의 강자가 되려면 이 같은 사회적 신뢰를 높여야 한다. 이는 현재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에 관한 한 우리는 좋은 형편이 아니다. 한국이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다는 경고는 1990년대부터 제기됐다. 후쿠야마는 한국이 낮은 사회적 신뢰 때문에 IMF 사태를 겪었으며, 이후로도 신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거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과 믿음을 한국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정기적으로 실시된 ‘세계가치관조사’에서 한국은 항상 주변국들에 비해 사회적 신뢰가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타인을 믿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인, 미국인, 중국인들보다 항상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이들 중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신뢰가 낮아지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세계가치관조사를 분석한 연구들은 신뢰와 제도화된 신뢰로서의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갈수록 후퇴하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사회적 신뢰가 낮은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군부독재를 경험했거나, 종교참여율이 높고, 노조조직률이 낮다. 국내총생산도 대체로 낮은 편이나 더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률이 낮은 경우다. 사실상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군사문화를 뿌리 뽑고, 삶을 세속화하고, 노조조직률과 경제성장률을 동시에 높이면 사회적 신뢰 또한 스스로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조건들은 개인의 객관적 이익과 주관적 가치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사회적 신뢰는 이러한 공정함 속에서 싹트는 것이며, 공정함은 시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이 공정함을 싸워 얻어낼 것인가.
안경환 칼럼이 조선일보에 실린 날 김규항은 경향신문에 “88만원 세대와 88억 세대”라는 칼럼을 썼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에 대한 기성 세대의 멘토링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사악한” 것인지, 그리고 이 허위의식을 젊은 세대가 얼마나 빨리 알아챘는지 예의 직설적인 어투로 풀었다. 이 글의 미덕은 김규항 스스로 기성세대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그가 미안한 이유는 기업하기 좋게 만들려고 노동하기 나쁘게 만들어 버린 “계급적 참상”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가 김규항의 사과는 받아들일지언정 그 이유까지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세계가치관조사에서 한국의 젊은 세대가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물질주의적 가치의 내면화이다. 매 시기 젊은 세대는 윗세대보다 항상 덜 물질주의적이었지만, 세대 간 차이가 급격히 줄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이념적 지향의 다양화이다. 이들은 구좌파의 이념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구좌파와 신좌파 이념 모두에 정통하다. 소위 386 세대의 이념 독해 능력이 구좌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인터넷으로 무장한 세대는 이념과 가치의 선택지를 넓혀 왔다.
총리 후보자의 암담함은 공분이라도 불러 일으켰지만, 야당 대표선거에 나선 소장파의 진부함은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이념에 앞서 팩트를 체크하는 세대에게 신뢰라는 공동체적 가치가 직접적인 목적이 될 리 없다. 윗세대가 실패한 사회적 공정함을 추구할 테지만, 더 다양한 세계관들을 통해 접근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두려웠던 여정은 항구에 다다르지 못한 채 끝나가고 있다. 캡틴이 없는 젊은 세대, 불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 캡틴이 되길 바란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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