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값 인상·연말정산 파동 후 중산층, 증세 자체엔 공감 늘어
"세금 적재적소에 안 쓰여" 38%, 정부 정책에 불신감 드러내
“복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더 끌어올리기 위해 세금을 더 낼 생각은 있다. 단, 부자증세가 선행돼야 한다. 증세 규모와 방법도 정부가 아닌 별도의 사회적 합의기구에서 정해야 한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중산층의 의중이다. 안정된 소득(월평균 300만원 이상)과 직장(전문직 및 사무직)을 가진 중산층은 호주머니에 돈이 있고 그걸 꺼낼 의향도 있어서 사실상 증세 논의의 성패를 좌우할 ‘캐스팅보터’다. 하지만 “구멍 난 국가 재정을 메우게 세금 좀 걷자”는 정부의 말 한마디에 선뜻 나설 만큼 정부를 신뢰하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파동을 거치면서 세금은 ‘나쁜 돈’이 됐다. 또 북유럽 등 복지 선진국들과 달리 내가 낸 세금이 ‘나와 가족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믿음도 확고히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도 충분히 희망은 엿보인다. 전문가들은 “여론조사를 보면 중산층이 증세에 공감하고 있는 만큼, 지금이 이런 인식 왜곡을 바로 잡고 ‘증세 있는 복지’로 나아갈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와 재정학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대국민 인식조사를 보면 증세를 두고 정부와 민심의 괴리는 상당하다. 세금을 걷는 주체인 정부는 정작 “증세는 없다”며 요지부동인데 제 지갑을 털어야 하는 국민은 오히려 복지확대를 위해 추가로 세금을 낼 의향이 “있다”(53.4%)고 답했다. 담뱃값 인상이나 연말정산 파동 등에서 단 돈 10원의 세금도 더 낼 수 없을 것 같은 격한 증세 거부감을 보여줬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특히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이들 중 소득 계층별로 보면 300만원 미만은 47.9%에 그친 반면 300만~500만원 미만은 60.0%, 500만원 이상은 54.6%에 달했다. 중산층 이상의 경우 “복지 수준이 낮아도 세금을 더 내는 건 싫다”는 통념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셈이다.
현재 납부하고 있는 세금에 대해서도 ‘적정한 편’(46.7%)이라거나 ‘낮은 편’(10.8%)이라고 답한 이들이 절반을 크게 웃돌며(57.5%), ‘높은 편’(38.4%)이라고 답한 이들을 압도했다. 세금 부담 자체가 높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정부의 편법ㆍ우회 증세, 불평등한 과세 등 불합리한 조세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부당한 세제로 세금을 빼앗기느니 충분한 공론화를 거쳐 제대로 세금을 내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증세로 이어지기 위해선 정부에 대한 신뢰 회복이 급선무다. 어떤 세금을 어떻게, 얼마나 올릴지는 그 동안 정부와 정치권의 고유영역이었지만 국민들은 이제는 별도의 사회적 합의기구가 주도해야 한다(39.6%)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정부 주도 방식(40.8%)이 근소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부문별로 보면 30대(48.8%)와 40대(46.5%), 전문직 및 사무직(47.4%), 월평균 소득 300만~500만원 미만(46.4%)과 500만원 이상(42.5%) 등 핵심 납세 계층은 정부보다 사회적합의 기구를 더 신뢰했다.
김경수 성균관대 교수는 이를 두고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결과”라고 평했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세금을 누가 얼마나 더 부담하고 있는지, 거둔 세금이 필요한 사람에게 얼마만큼 돌아가고 있는지 등에 대해 대다수 국민이 납득할 만한 통계를 만들어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도 세금과 복지 관련 통계가 많지만 상당수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아전인수 식으로 악용되고 있어 결과적으로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설문에서도, 증세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상당수가 ‘세금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않아서’(38.4%)라거나 ‘결과적으로는 부자감세, 서민 증세로 느껴져서’(27.6%)라는 점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피부로 와 닿는 가계부담(25%)보다 ‘정부 불신’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증세 논의에 더 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증세의 우선순위를 놓고도 국민들은 무너진 형평성 복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법인세(76.2%)와 종합부동산세나 상속ㆍ증여세 등 자산과세(71.7%)를 우선 손봐야 한다는 의견이 개인이 내는 소득세(16.5%)를 올리자는 의견의 5배에 육박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깎아줬던 법인세율을 복원하고, 부자와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을 지금보다 늘리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자신보다 재산을 더 많이 가진 계층이 소득 대비 세금을 상대적으로 덜 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중산층과 서민은 증세에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세금이 소득별로 공정히 걷히고 있고, 그것이 본인과 사회를 위해 좋은 방향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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