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하층민" 53% "중간층" 36%, 무력한 현실·불확실한 미래 반영인 듯
한국일보와 재정학회가 공동으로 기획한 신년 여론조사는 복지ㆍ증세 논쟁의 한 가운데서 민의의 실체를 탐문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여론조사 결과에는 정부나 여야 정치권보다 전향적이고 합리적인 국민의 정책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은 먼저 정부에 대해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이 낮은 실현가능성과 정책 미숙으로 인해 지켜지지 못했음을 강하게 질타했다. 정부는 3분의 2 이상의 국민(70.8%)이 내린 심판을 정책기조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권의 지지자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국민(20.2%)만이 현 정부의 대표적인 공약이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先) 복지 축소와 증세 우선을 두고 대립하는 정치권에 대해서도 국민은 절충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절반 이상(50.7%)의 국민들이 복지 수요 증가에 대한 정책 대응으로 세금과 복지의 ‘동시 조정’을 주문한 것이다. 나머지 국민들 중 증세(11%)보다는 복지 수정(19.3%)을 선택한 경우가 더 많다는 점에서 복지에 대한 부분적인 조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보편과 선별 사이를 끝없이 오간 복지논쟁을 경험한 후, 국민은 정치권의 이분법적 대립을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했다. 다수의 국민(62.7%)은 혜택의 크기는 소득에 따라 차등화하되 수혜 대상은 가능한 한 넓게 유지하는 방식이 우리 사회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고소득층을 수혜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복지 정책에서도 공동체와 평등을 중시하는 우리의 국민적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론조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희망적인 소식은 바로 절반 이상(53.4%)의 응답자가 복지 확대를 위해 추가적인 세금 부담 의향이 있다고 밝힌 부분이다. 복지 확대가 국가적으로 시급한 과제이고, 이를 위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고민의 결과로 읽혀진다. 성공적인 복지사회의 안착을 위한 핵심적인 전제조건이 우리사회 내에서도 서서히 성숙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추가 세금을 부담하는 보편적 증세(간접세 증세) 논의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도 부족하다. 45.4%의 응답자들이 추가 세금을 부담할 의향이 없다고 답함으로써 보편적 증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지 확대를 위한 바람직한 증세의 형태로 국민들이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자산을 보유하는 계층에만 부과되는 부유세의 도입을 선택한 응답자(47.8%)가 가장 많았으며, 소득과 재산 수준에 따라 세금을 비례적으로 분담시켜야 한다는 방식(27.4%)과 기업 부문의 세금을 증가시키는 방식(19.4%)을 선호하는 응답자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다름 아닌 담세 능력을 국민은 최우선적인 증세 원칙으로 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 사회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활용했던 부가가치세 인상과 같은 보편적 증세 방안이 우리사회 내에서 거론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임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여론조사의 여타 응답에 나타난 합리성과 대비되는 한 가지는 52.8%의 국민들이 자신은 경제적으로 하층민이라고 답한 부분이다. 중간층이라고 답한 비중도 35.9%에 불과했다. 비정상적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는 이러한 비관주의는 주관적 판단의 오류라기보다는 무력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신음하는 국민의 고통에 다름 아니다. 복지의 확대와 이를 위한 공정한 조세정책 수립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재정학회 대표집필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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