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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실직 극복 연 매출 20억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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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실직 극복 연 매출 20억 기업

입력
2015.02.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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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직장상사와 불화로 실직

자녀 앞에 출근 시늉...공터서 소일

환경관련 업무대행업 창업

"직장 생활 중 늘 사업계획서 썼다"

경북 포항 북구 양덕초등 건너편에는 지구환경측정㈜이라는 작지만 강한 회사가 있다. 환경 분야 측정 및 컨설팅 전문회사로, 공장 등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을 진단해 준다. 신속ㆍ정확하고 철두철미한 일 처리는 물론 이현철(48) 대표가 2004년 변두리 한 전세아파트에서 시작했다는 점에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현철 대표가 회사를 설립하게 된 것은 남편을 대신해 실업급여를 수령하러 다니는 아내 김명량(43)씨의 뒷모습을 보고 오기가 발동하면서부터다.

회사 설립 당시 부부는 실업자였다. 공중보건학을 전공한 그는 1993년 고향인 포항에서 한 환경측정회사에 다녔다. 10년 만에 차장으로 승진하는 등 직장생활은 순조로운 듯 했으나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그를 괴롭혔다. 몇 차례나 사표를 썼던 그는 소속 회사 대표의 만류로 눌러 앉았다. 어느 날 폭발했다. 대학 후배이면서 직장 동료인 아내가 보는 앞에서 상사로부터 심한 면박을 당했고, 이번에는 아내가 분노했다. 아내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이혼할 각오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둘은 더 이상 그 회사에 다닐 수 없었다.

이 대표는 “실직,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한 집안의 가장이 갑자기 수입이 끊겼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만두라고 엄포를 놨던 아내는 실업급여라도 받아야겠다며 회사를 다시 찾아가 사정하고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는 아이들이 부모의 갑작스런 실직에 충격을 받지 않을까 매일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깔끔하게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갈 곳이 없었다. 집 근처,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법한 공터에 차를 세우곤 눈물을 훔쳤다. “억울하다는 생각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으로 막막했어요.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점심도 굶고 집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아내가 걱정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더군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기 싫어 지구환경측정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렇다고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다. 서류상 존재하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 회사에서 환경 인ㆍ허가 관련 서류를 대행에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공식적으로 첫 실적이었죠. 사업자등록도 해 둔 상태였으니 일 처리는 문제가 없었어요. 큰 회사에선 ‘돈이 안 된다’며 외면하던 내용이었지만, 제겐 희망의 전주곡이나 마찬가지였죠.”

큰 돈은 아니었지만 꼼꼼한 그의 일처리 탓에 일감이 끊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민을 생각했다. 전 직장에서 응어리진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은 탓이었다. “실직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더 싸게 한다는 말을 듣고 오기가 났죠. 무능해서 실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전세 집에서 하던 일을 사무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업무에 필요한 인력도 충원했다. 오염물질 측정에 필요한 장비도 하나 둘 구비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직원들과 낡은 소파에 마주앉아 얼굴만 바라보다 퇴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거래처 확보를 위해 직접 영업에 나섰지만 회사 경비실조차 통과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지인의 소개로 근근이 꾸려나갔지만, 정부의 창업지원금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은 물론 직원 월급이 걱정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나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통장 잔고를 보니 4개월이면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중견 기업에서 일감이 들어왔어요. 구세주였죠.”

앞만 보고 달렸다. 낡은 상가 사무실에서 전기가 끊기기라도 하면 달빛아래 측정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덕분에 지금 지구환경측정은 직원 32명에 연 매출 20억 원, 거래처 370곳 이상으로, 관련 업계에서는 ‘중견’급 회사로 성장했다. 그 동안 대구지방국세청장 표창과 환경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13년 말 포항 양덕지구에 새 사옥도 지었다. 준공식 날, 포항 시장도 참석해 격려했다.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한 덕분이죠.” 그가 밝힌 성공 비결이다. 공동대표인 아내 김씨는 “남편이 사정이 어려운 공장의 측정 업무는 공짜로 해주고 오히려 돈을 주고 올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살맛 나는 직장 분위기 조성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신 사옥에 당구대와 골프퍼팅기를 설치했다. 회의실엔 텐트를 치고 기타를 비치해 야외분위기를 냈다. 이 대표는 “회사는 사장뿐 아니라 직원 한 사람의 생각이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즘도 그는 일 때문에 두 아이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큰 아이가 난치병을 앓고 있는데,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병원에 갈 때 같이 한번 가 주지 못하고, 주말에도 함께 놀아주지 못한 일이 제일 미안하죠. 다행히 큰 녀석이 3번의 대수술 끝에 건강을 되찾아 고맙기만 합니다.”

자녀에게 제대로 해 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가. 그는 지역 학생들을 초청해 과학 원리와 환경보호의 소중함 등을 가르친다. 최근에는 단순한 환경측정에서 컨설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나섰다. 불황으로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직장을 다닐 때도 늘 사업계획서를 썼다”며 “힘들 때 주변 탓만 하지 말고 작은 목표라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정혜기자 kj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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