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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위대한 알렉시스

입력
2015.02.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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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서울보다 초라하다. 간단한 입국 심사조차 없는 관문 공항 풍경부터 엉성했다. 혁대를 풀어헤치고 신발까지 벗기던 독일과 딴판이다. 관광국가인데도 안내판이 몽땅 그리스어뿐이다. 지하철에는 찡그린 이맛살과 걸인들로 넘쳐난다. 20%가 실업자다!

그러나 아테네의 거리 풍경이 조금 익숙해지자 그들의 무관심과 허술함이 도리어 편안하게 느껴졌다. 반도국가 그리스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을 때가 많았다. 16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식민지로 수모를 당했다. 일제강점기 김교신은 한반도와 그리스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탁월한 문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침략과 강탈 앞에 속수무책이었다는 뜻이다. 그리스의 자랑인 파르테논 신전은 로마 지배 아래서는 기독교의 성전으로 변했다. 또 이슬람의 지배를 받자 모스크로 탈바꿈했다. 이것이 신전으로 다시 복구된 것은 그리스가 독립된 다음의 일이다.

제2차 대전 때 그리스는 히틀러 독일의 지배 아래 신음했다. 전후에는 친미파와 친소파가 내전을 치렀다. 한국의 6?25전쟁과 유사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그 뒤로는 키프로스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터키와 분쟁을 겪었다. 냉전이 극에 이르자 미국은 그리스의 지정학적 가치를 평가해 적극 개입했다.

‘경제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때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과시했다. 그러나 번영은 짧았고 끝은 허망했다. 2010년 국내외 여러 요인이 뒤엉켜 그리스는 국가부도위기에 빠졌다. ‘트로이카’라 불리는 국제통화기금, 유럽연합 및 유럽중앙은행의 간섭이 노골화했다. 그들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주문했다. 연금이 싹둑 잘려나가고 의료비 지원이 사라졌다. 취업률은 바닥까지 추락했고 자살률은 사상최고치를 갱신했다. 간섭의 주역은 독일 정부였다. 그들의 혹독한 요구에 순종한 무능하고 외세의존적인 그리스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런 와중에 시민의 생존권을 지키고 그리스인의 자존감을 회복하겠다며 마흔 살의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015년 트로이카가 원치 않는 정권이 탄생했다.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가 “무책임한 정부”를 선택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서방세계 보수 논객들도 치프라스 정권을 매도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치프라스 정권을 지지한다. 시내 번화가 플라카의 후미진 골목에서 ‘위대한 알렉시스(Alexis The Great)’라고 쓴 벽화를 발견했다. 치프라스를 응원하는 시민의 외침이다.

그리스는 한국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지하경제 규모가 40%나 되고, 재벌의 횡포가 고질적이다. 그들은 시민과 법률 위에 군림한다. 탈세는 기본이다. 재벌은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를 장악해 여론을 호도하며 부패 정객들과 결탁해 국가경제를 축낸다. 민영화 정책에 편승해 자신들의 부를 손쉽게 축적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민의 고통을 분담하려고 애쓴 적이 없었다. 틈만 나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면서도 특권적인 지위를 대대로 유지한다. 정치권에도 세습귀족이 있다. 3대가 총리를 역임한 집안이 있을 정도다. 치프라스가 이끄는 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한 데는 이런 사회적 배경이 있다.

그리스 새 정부는 트로이카와 협상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까딱하면 유로권이 해체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파탄의 최대 피해자는 그리스가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의 중심국가이기 때문이다. 독일 관리들이 큰소리로 짖을 뿐 심하게 물지 않는 개와 같다고 한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지적이 날카롭다. 바루파키스는 게임이론에 정통한 경제학자다. 그는 유럽 약체국들과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트로이카의 잘못된 조치를 일일이 문제 삼는다. 최근 임명된 반부패장관은 청렴한 검찰 출신으로 재벌과 전쟁을 선포했다. 이런 인재들이 자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트로이카와의 협상에 힘을 보태는 중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앞날이 어둡지만 않다. 치프라스 정권은 트로이카와 혈전을 치른 끝에 단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 시민들이 바른 선택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2,500년 전 족벌정치에 대항해 아테네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페리클레스가 생각난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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