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별 설렘 없이 맞게 된 건 이제 아이가 아니라는 우쭐한 자각을 마음 한쪽에 여투는 일이기도 했다. 화학섬유 냄새 물씬 나는 새 바지나 스웨터를 입고 설날 아침 동네 아이들과 은근히 겨뤄보는 일도 초등학교 몇 년이 지나자 조금은 시들해졌던 것 같다. 그런 일들이 왠지 유치하게 느껴질 무렵, 여드름이 나면서 괜히 목소리도 굵게 만들고 그랬을 테다. 왜 그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정말 나는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얼마 전 트위터를 들여다보다 황현산 선생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 아, 했던 기억이 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말한다면 선생께 무례를 범하는 일이 될까. 트위터라는 게 그때그때의 생각을 툭툭 말로 털어놓는 공간이라, 인용이 조심스러운 측면도 없지 않으나 나중에 단단히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여기 옮겨본다.
“내가 살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직업을 갖고 애를 낳아 키우면서도 옛날 보았던 어른들처럼 우람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고 늘 허약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늙어버렸다. 준비만 하다가.”
말의 제대로 된 의미에서 ‘어른’이 귀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얼치기로나마 문학 동네를 기웃거리며 글공부를 하고 있는 내게 황현산 선생은 그저 우람한 산이다. 많지는 않지만 뵐 기회도 있었다. 글에서 배운 두텁고 깊은 지혜와 통찰, 기품이 그대로 당신의 모습이었다. 전혀 내세울 뜻이 없는 따뜻하고 겸손한 권위 앞에서 ‘어른’이라는 말이 절로 내 마음에서 솟았다. 선생이 내신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과 태도에서도 지금의 내 어설픈 느낌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하다. 그런 터라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말이 충격이 아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테다. 물론 찬찬히 새겨보면 삿되고 광포한 세상의 위세를 어쩌지 못하는 한 지성의 무력감의 토로로 읽을 수도 있다. 서생의 길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삶을 옛 어른들의 강건한 무실역행에 되비추는 겸손과 회한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내심 선생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고 싶었고, 그렇게 위로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황현산 선생의 너무도 솔직한 토로에 나의 불안과 허약을 기대겠다고 하면 언감생심일 테다. 다만 나 자신 생물학적 연령의 덧셈과 무관하게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시간이 밀어내는 대로 어, 어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게 가감 없는 진실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얼까. 교과서적으로 말한다면 입사과정(Initiation)을 먼저 치른 자로서 공동체에 대한 성숙한 책임과 윤리를 갖는 일, 무언가 들려줄 만한 생각과 말을 마련하는 일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위악일 테지만, 실다운 느낌으로 나 자신의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여문 것들은 너무도 빈약했고 언제나 임시방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언제나 손쉬운 합리화는 다음을,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었을 테다. 사실 이제는 솔직해질 때도 되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때도 되었지 싶다. 그런 내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선친은 조금 일찍 반백이 되셨는데, 지금 나는 그 설날 아침 무섭게 차례 길을 재촉하던 아버지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선친 영향인지 나도 일찍 머리가 세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반백이다. 그때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당신의 세월로부터 세상을 버텨나갈 말과 걸음을 충분히 여투어두셨던 걸까.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야단맞은 기억 말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사랑도 많이 주셨던 듯한데, 그때는 잘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는 빨리 늙어가셨고, 그 불같이 호통 치는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1977)은 네 편의 중편 연작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문을 여는 작품이 ‘일락서산(日落西山)’이다. ‘관촌수필’ 연작 전체가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소설적 허구의 개입이 거의 없는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은 이중과세(二重過歲)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음력설을 못 쇠게 했다. 음력설인 구정(舊正)은 한동안 공휴일이 아니었다. 내게도 아침에 잠깐 학교에 가서 출석 확인을 받고 차례를 모시러 갔던 기억이 있다. 신정을 ‘왜놈 세력(歲曆)’이라고 타기했던 조부의 성묫길이었지만, 사정이 그런 탓에 신정 연휴를 끼고 고향 갈머리마을(관촌)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이야기다. 작가의 살과 뼈과 여문 마을이지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더구나 작가의 집안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쑥밭이 되고 만 터였다. 비 내리는 정월 초사흗날 오후 작가는 실향민이 된 듯한 쓸쓸한 마음으로 조부의 가묘(假墓) 자리와 옛 고향집을 더듬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그 회상의 태반은 고색창연한 이조인(李朝人)이었던 할아버지에게 바쳐지고 있는데, 작가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과 영향은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반면 해방공간의 좌익운동에 뛰어들었던 아버지는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을 확인했던 어린 시절의 삽화 한 토막에 있다.
전쟁 전 작가의 아버지는 예비검속되어 읍내 유치장에서 달포 가까이 구금생활을 한 적이 있다. 어린 아들은 조석으로 어머니가 싸주신 뜨겁고 무거운 찬합 보따리를 들고 경찰서를 오간다. 어린 마음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외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나름 자부심도 느끼며 힘든 줄 모르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출감하던 날 아버지는 짐짓 아들의 손목을 잡아주며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그새 할아버지 말씀 잘 들었니?” 애썼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아버지에게 느꼈던 거리감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아버지한테서 차갑고 무정한 거리감, 아니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나는 그때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그 시대 아버지들의 일반적인 훈육 방식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럽다. 자식에 대한 애정을 호들갑스레 드러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엄격함은 당시로선 서운한 일이었으되, 이 회상의 지점에서는 어떤 존경과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나는 ‘차갑고 무정한 거리감’이나 ‘공포감’이란 표현을 글자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는 별도로, 어린 아들은 그때 가혹할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러한 상처는 ‘엄격한 훈육’이라는 말로 가려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크게 보아 한국 현대사의 파행이나 시대의 한계 속에서 이해할 이야기일 테지만 말이다.
우리 시대 어른 되기의 힘겨움은 조금 사정을 달리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아이들, 젊음들 앞에 닥친 세상의 힘겨움을 덜어줄 별다른 지혜나 충고의 언어를 마련해놓지 못했다는 무력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일락서산’에서 어린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직접 서예 강습을 받게 되는데, 아버지와 함께한 최초이자 최후의 공부시간이었다. 그 공부는 아들의 무딘 재주를 탓하는 아버지의 탄식을 남기며 한 시간 남짓 만에 끝난다. 비긋이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그 삽화는 두루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비슷한 풍경으로 재생될 법도 하다. 다만 이제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으려나. 설을 지나면 이제 제대로 한 살을 더 먹는다. 떡국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내고 싶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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