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받는 딸애한테서 하루는 강아지 뒷다리 수술비가 100만 원이 들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망설이다 수술비를 보내줄까 문자를 보냈더니 자신이 해결했다고 한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의사와 상의해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으로 수술비를 할부로 갚겠다고 했단다. 이것이 스웨덴 젊은이들의 사고다. 그것도 외국에서 혼자 사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세 젊은이의 독립적 생활방식이다. 스웨덴에서는 18세가 되어 성인이 되면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한다. 스웨덴 ‘부모법’에는 18세가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모는 부양의 의무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얼마 전 한국교육개발원에서는 우리나라 성인들의 시민 역량 부족이 대학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교육의 핵심이 ‘지식’에서 ‘역량’으로 바뀐 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 젊은이들의 학업역량, 시민역량, 자기관리역량, 진로 직업역량이 낮은 것은 우리사회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관리역량은 주체적으로 책임 있는 삶을 관리하는 능력으로 미성년자와 구분되는 성인의 필수 역량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 대학생들은 아주 낮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수치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녀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사는 젊은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결혼할 때 주택을 마련해준다. 스무 살 갓 넘은 스웨덴의 젊은이가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으로 강아지 수술비를 할부로 갚는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그럼 왜 이 두 나라 사이의 젊은이들은 독립심?자립심에서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걸까? 첫째는 부모의 역할 차이다. 두 나라 부모 모두 자식을 사랑하나 그 방법이 다르다. 스웨덴 부모들은 성인이 되면 자식이 독립해야 되는 것을 알기에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독립심을 키워준다. 유아가 스스로 밥을 떠먹게 하는 것에서부터 커서는 직장, 대학 및 배우자 선택에 이르기까지 자녀들이 결정하게 한다. 집안일과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경제적 책임을 지게 한다. 매정한 점이 있다. 반면에 한국의 부모들은 어떻게든 자식을 껴안고 돌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과도한 경쟁에 의한 대입 위주의 현 교육체제가 큰 원인이기도 하다. 부모가 기획하고 지휘하고, 학교와 학원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 같은 삶에서 우리 아이들은 주체성을 잃고 학습된 무기력의 연쇄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들은 과히 헌신적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아이들의 독립심을 키워주지 못하고 자립을 방해하는 왜곡된 헌신이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자녀의 사회진출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 아이들은 평생 결핍을 느끼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평생 쪼들리며 산다. 가난과 부가 대물림되는 불평등 사회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게 하는 이기주의적 사회구조다. 우리나라 부모인들 자녀의 독립을 원하지 않을까? 그러나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고 아파트값은 살인적이니 어떡하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독립심을 키워주지 않고 하나에서 열까지 부모가 결정하고 돈으로 해결하면 자녀들의 의존은 더욱 심화되기만 한다.
둘째로 우리 젊은이들이 독립·자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가의 역할 부재에 있다. 어떤 상황이 부모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때 북유럽사회에서는 국가가 복지제도를 통해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스웨덴 복지의 근본철학은 어느 개인(자녀)도 다른 개인(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인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무상교육과 교육보조금, 주택보조금, 청년실업 대책 등이 젊은이들의 독립·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복지제도다. 그런데 우리 국가는 뭘 하는가?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젊은이들을 방치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지 못하는 이기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데도 방관하고만 있다. ‘작은 정부’ 논리론 안 된다. 젊은이들이 무너진 나라에 어떻게 기업이 있고 경제성장이 있는가? 젊은이를 버린 나라는 미래를 버린 나라다.
황선준 스톡홀름대 정치학 박사ㆍ전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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