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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항왜장수(降倭將帥) 김충선

입력
2015.02.1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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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에는 항복한 왜군(降倭) 준사의 활약이 그려진다. 일본군진에 침투해 공격 일시 등 핵심 정보를 캐내오고, 명량 해전 당일에는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에 승선해 싸우는 중 바닷물에 떠다니는 적장 구루시마의 시신을 알아보고 건져 올린다. 이순신은 즉각 구루시마의 목을 효수해 장군선 돛대 끝에 매달게 했다. 이에 결정적으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수군은 앞다퉈 도망치기에 바빴다. 명량 해전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기간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해 왔는데 연구자들은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은 전쟁 초반에는 항왜 포로들을 대부분 죽였지만 1594년부터는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군 전술을 잘 아는 데다 검술이 뛰어나고 조총을 잘 다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조총 제작 등 총포기술 전수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순신 휘하에는 준사 외에 야여문 등 여러 항왜 부하들이 있었다. 항왜들은 전란이 끝난 뒤 북방 변경에 배치돼 여진족 토벌에서 맹활약했고, 이괄의 난 진압, 정묘ㆍ병자호란에도 투입됐다.

▦ 항왜 장수 김충선(金忠善)은 일본 동군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 무장으로 부산 동래성에 상륙한 다음날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투항했다. 일본 이름이 사야카인 그는 경상도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하며 전투마다 큰 공을 세웠다. 일본 조총부대를 이끌었던 그가 조총 제작기술 전수에 핵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조정에서 이런 공로들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 정이품 정헌대부에 올랐고 선조에게 성명도 하사 받았다. 말년에 대구로 낙향, 사성 김씨의 시조가 된 그는 녹동서원에 배향되었다.

▦ 엊그제 방한했던 일본 집권 자민당 니카이 도시히로 총무회장이 한일 우호협력 모델로 김충선 장군을 들었다. 니카이 총무회장의 지역구는 바로 김충선의 고향으로 유력시 되는 와카야마. 니카이 총무회장은 이곳에 김충선 기념비를 세우고 기려왔으며 이번 방한 중에 김충선의 후손들도 만났다. 500년 전 집권자의 탐욕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반기를 들고 고독한 선택을 했을 항왜 무장 김충선. 그가 오늘날 꽉 막힌 한일관계에 물꼬를 트는 우호의 상징으로 새삼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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