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들이 유치원에서 한글쓰기를 배울 때의 일이다. 교재에 가족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아래 직업을 쓰는 페이지가 있었는데, 우연히 들춰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빠: 기자, 엄마: 주부.’ 기자 부부인 우리를 두고, ‘아빠는 기자, 엄마는 주부.’ 사랑을 가득 담아 정성껏 그린 그림 속에서 나는 앞치마 입고 한 손에 주걱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뭐, 내가 육아휴직도 좀 하고, 주부가 아닌 건 또 아니지. 집에서 본 엄마 모습이라곤 그게 전부니…’라고 마음을 다독이면서도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엄마가 썼다며 저한테 보여주고, 읽어준 기사가 몇 갠데…. 회사의 한 선배는 집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데, 어린 딸이 달려와 “신문은 아빠가 읽는 거야”라며 뺏은 적이 있단다. 엄마가 신문기잔데!
주부가 직업의 서열에서 하위를 점한다거나, 기자 엄마만 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빠는 절대 주부로 착각할 수 없는 가정문화와 ‘신문 읽는 아빠 vs 밥 하는 엄마’의 구시대적 성별분업을 여전히 주입하고 있는 교육현장에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직업이란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과 대부분을 보내며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니까 엄마는 주부라기보다는 기자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답이고, 신문이란 성별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이며 엄마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더더욱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이 자명한 사실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설명해야 하는 21세기의 구태가 짜증스러운 것이다.
아이들은 도처에서 배운다. 성차별이 대기의 질소처럼 만연한 사회에서 엄마 혼자 아무리 양성평등의 메시지를 주입해봐야 별무소용이다. 운이 좋은 탓이었겠지만, 나는 승리한 페미니스트를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시스템에 포획된 후 너무 많은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 제사와 명절 때면 ‘내 조상은 누구였던가’ 새삼 궁금해지며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같은 내면의 외침이 절로 나왔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신앙처럼 받든 나머지 육아와 가사를 도맡게 됐다. 어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게, 집안에 큰 소리 안 나게 만드는 게 현명한 거라고, 내 아들과 딸만은 이렇게 살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종내 순응주의에 투항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엄마처럼 살지 말라’던 내 엄마의 희망을 저버리며 나는 다만 실패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이 땅의 많은 여성들이 미래를 기약하며 이 순응주의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결정권이 박탈된, 사실은 강요된 이 순응주의는 우리가 가슴 속에 겹겹이 울화를 쌓으며 살아온 보람도 없이 전략적으로도 틀렸다는 사실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아빠는 아들의 미래이며, 아이들은 들은 것을 실천하기보다 본 것을 흉내 내며 자라난다.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갓 지은 밥을 유독 좋아하는 아들내미는 유치원의 좋아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할 거냐는 질문에 “걔가 갓 지은 밥을 잘할 수 있을까” 홀로 회의하는 결혼적령기 ‘수꼴남’의 모습을 선보이며 한 차례 나를 기함시킨 바 있다. 오, 신이시여!
주변의 딸 가진 엄마들을 보면, 나는 종종 두려워진다. 일체의 차별 없이, 마치 남성은 능가하라고 마련해주신 신의 뜀틀이라는 듯, 모든 기회를 제공받고 그 기회를 한껏 누리며 훌쩍훌쩍 그 뜀틀을 넘어서는 알파걸들. 강력한 ‘딸바보’ 문화의 자장 속에서 자라난 우리 시대의 딸들에게 성차별이라는 개념은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사어(死語)에 가깝다.
곧 설이다. 훗날 내 아들이 회상하는 명절의 풍경은 여자들만 부엌데기처럼 종종거리며 땀을 흘리고, 남자들은 신문 들춰가며, TV 채널 돌려가며, 여유를 만끽하는 ‘평화로운’ 모습이겠지. 성년의 아들이 여자들에게 “따뜻한 방에 누워있으면 동그랑땡 부쳐다 주시던 엄마 같은 여자 만나고 싶다”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개명한 미래의 시어머니들이 제사, 명절에 일 안 시키고, 시댁 친정 동등하게 왕래하도록 배려해봤자 아들내미가 드러누워 한 마디 하면 게임 끝. “우리 엄마도 일하고 바빴지만 다 했어.” 지금 바꾸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혁명은 부엌에서부터. 여보, 올해부턴 당신이 어머님 대신 전 좀 부쳐야겠어.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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