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으로 의사·변호사 호출, 프리랜서 노동자의 여유시간 이용
고용·해고 손쉬워 노동조건 악화, 안전보장과 복지혜택은 꿈도 못 꿔
전문성 약화 등 미래 부작용 경계, 정규직이 세금·연금도 떠안아야
33세 미국인 데이비드 호튼씨는 매일 저녁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고급 승용차를 불러 퇴근한다. 미혼으로 혼자 사는 그는 주말이면 앱을 통해 청소도우미를 집으로 불러 대청소를 시킨다.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누군가가 식료품을 대신 사 두 시간 안에 배달해주는가 하면, 기념일엔 유명 식당 요리사들이 준비한 음식을 집에서 즐길 수 있다. 심지어 지난해 겨울에는 급성 독감으로 꼼짝 못했는데, 앱으로 의사를 집으로 호출해 진료를 받았다. 호튼씨 자신 역시 변호사로, 법률 자문 서비스업체에 프리랜서로 가입해 주로 온라인으로 고객의 요청을 처리한다.
개인 운전사와 청소도우미, 고급 요리사, 주치의, 전담 변호사까지. 한때 부자들만 향유했던 각종 고급 서비스를 이제는 대중들도 누릴 수 있게 됐다. 온라인으로 클릭만 하면 서비스를 즉각 대령하는 ‘주문형 경제’(on-demand economy)가 급속히 발전한 덕이다. 20세기 초 헨리 포드가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과 이동식 조립 라인을 이용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해 산업의 혁신을 불러왔듯, 오늘날 많은 서비스업체들은 정보통신 기술과 프리랜서 노동자를 결합해 새로운 경제 환경을 탄생시키고 있다.
수조원대로 성장하는 주문형 경제기업
주문형 경제 규모는 최근 수년 새 급성장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공유형 유사택시서비스 우버(Uber)는 53개국에 진출, 지난 한 해에만 10억달러(1조1,000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기업 가치는 400억달러까지 올랐다. 일반 택시보다 요금은 비싸지만 원하는 시간에 즉시 탑승할 수 있는데다 차종이나 기사 선택도 가능해 인기가 높다. 음식 주문ㆍ배달 서비스인 그러브허브(Grubhub)도 700개 도시에서 매달 380만명이 이용해 지난해 16억달러 매출을 달성했다.
주문형 경제가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급변하는 기술이 있다. 이제는 노트북 한 대로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대체할만한 영상 제작이 가능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나 법적인 문서 작성 같은 복잡한 업무도 비전문가가 약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변화로 인해 대기업들은 정규직 고용 대신 필요 시 고용했다 쉽게 해고할 수 있는 계약직을 선호하게 됐다. 미국에서만 5,300만명이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계약직 인력시장이 커지면서 소비자 요구는 점점 까다로워지고, 돈을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다양한 고급서비스를 편하게 누리려는 욕구도 커졌다.
주문형 경제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칼 마르크스는 세상이 자본을 가진 부자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로 나뉜다고 설명했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돈은 가졌지만 시간이 없는 사람들과 시간은 가졌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로 나뉘게 됐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주문형 서비스업체는 두 집단이 남는 자원을 상호 교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주력한다. 이제까지 기업들이 거래비용이나 고정비용 등에 신경 썼다면, 신생 기업들은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하고 이들 사이에 거래되는 서비스의 질을 관리하는 데 집중한다.
높은 노동유연성은 노동조건 악화 초래
주문형 경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노동 유연성’의 극대화다. 긍정적으로 보면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고, 본업을 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에 또 다른 일을 하며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아룬 순다라라잔 뉴욕대 경영학 교수는 “사람들은 주문형 경제에서 노동을 통해 여유시간을 화폐화할 수 있다”며 “노동자들이 여유시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주문형 서비스들은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우버 운전자들은 일주일에 1시간에서 15시간까지 탄력적으로 일한다. 다수 택시 기사들이 하루 종일 일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프리스턴대 경제학자이자 오바마 정부의 경제자문위 전 회장인 알란 크루거 박사는 자체 조사를 통해 우버 운전사 대부분이 가입 당시 이미 정규직, 비정규직 형태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버에 가입하게 된 주요 유인도 부업을 통한 추가 소득이다. 반면 이러한 특성 탓에 주문형 경제는 마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듯 필요할 때만 인력을 고용하고 또 수도꼭지를 잠그듯 쉽게 해고해 노동의 안정성을 크게 악화시키는 ‘수도꼭지 경제’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주문형 경제의 또 다른 문제점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등 직업에 수반되는 위험들을 모두 떠안는데다 임금이나 근로시간에 대한 제도적 보장마저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채 각종 위험을 떠안아야 했던 19세기 노동 환경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우버 운전자들은 자신의 차를 이용하면서 보험료도 스스로 부담하는 반면 우버 측에는 수익금의 20% 이상을 지불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안전보장이나 복지혜택은 물론 꿈도 못 꾼다. 이에 대해 우버 측은 “운전사들은 정식 고용직원이 아니고 우리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주문형 경제의 노동자 소외문제는 이미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존의 메케니컬 터크(Mechanical Turk)에 가입한 컴퓨터 기술자들은 최근 아마존의 중개 수수료가 과도하다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메케니컬 터크는 온라인에 등록된 인력이 컴퓨터가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들을 대신 해주고 보수를 받는 시스템으로, 이 서비스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일명 터커(Turker)들은 전 세계 50만명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이 근무시간당 임금은 2달러 남짓. 아마존은 터커들의 이렇게 적은 수입에서 수수료 10%를 떼어 간다. 한 캐나다 여성은 2005년부터 터커로 활동해 지난해까지 83만건이 넘는 작업을 수행했지만, 건당 받았던 실제 수입은 평균 20센트에 불과했다고 가디언에 밝혔다.
마이클 번스타인 스탠포드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해 여름부터 터커들과 함께 다이나모(DYNAMO)라는 사이트를 개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조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캠페인을 벌이는 중이다. 이 사이트에 서한을 올린 수백명의 터커 중 한 명은 “나는 숙련된 노동자이지만 시간당 1.45달러밖에 받지 못해 부양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의 삶 또한 어려운 상황이다”라면서 “우리는 인간이지 알고리즘이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예측 불가한 미래 부작용 경계해야
주문형 경제는 안정보다는 유연성에 가치를 두는 단순 노동자들이나 아이를 돌보며 사회생활까지 해야 하는 여성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전문성이 중요한 분야의 노동자들, 예를 들어 변호사나 의사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다. 시스템이 확장될수록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 자신들도 결국 이런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게다가 주문형 경제가 확대하면 정규직 납세자들은 세금이나 연금을 한 번도 낸 적 없는 다수 계약직 노동자들을 부양 하게 돼 전국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이자 전 노동부장관은 “모든 것이 주문형 경제로 변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봐라. 노동자 전체가 자투리 시간에도 삯일을 해야 하고 전문성은 약화돼 간다. 아무도 다음 직업이 뭐가 될지 모르고 임금도 얼마가 될지 모른다. 우리에게 사생활이라는 게 가능할지 어떤 종류의 관계가 유지될지 의문스럽다”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주문형 경제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 정책 입안자들이 다양한 효과를 미리 인식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주문형 서비스 업체를 불법화한 정부는 잉여 자원을 최대 활용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경제가 흘러가는 대로 방관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분석이다. 최선은 고용과 임금을 측정하는 방식을 환경 변화에 따라 거듭 수정하는 방법뿐이다.
라이시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주문형 경제를 선호한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들은 근본적으로 더 좋은 환경에서 높은 보수를 받고 싶어 한다”며 “이를 위한 고용과 임금 체계의 개편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신지후기자 h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