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문화재 지정 절차 착수… 세계 最古 금속활자 인정될까
2010년 남권희 교수가 첫 공개 파란
일부 학계 "위조 가능성 배제 못해"
역사를 다시 쓸 대발견인가, 거대한 사기극인가. ‘증도가자(證道歌字)’가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여부를 놓고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화재청은 12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 회의를 열고 증도가자에 대한 문화재 지정 절차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이 직접 조사해 이 활자가 진품으로 확인되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한다는 뜻이다. 학계에서는 여전히 진위에 대한 이견이 팽팽해 논란은 이제부터 본격화할 전망이다.
증도가자는 2010년 서지학자인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직지ㆍ1377년)보다 최소 138년 앞서 제작된 금속활자라며 실물을 공개해 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활자다. 하지만 개인소장품인 이 활자들의 유입경로가 불투명해 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이를 검증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 결과로 경북대 산학합력단이 최근 “샘플 14점에 묻은 먹의 탄소연대 측정결과 1033~1155년 사이에 만들어진 먹임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 논란이 재점화했다.
“탄소연대 측정으로 11~12세기 재확인”
이번 연구용역 과정에서 활자 개수는 2010년 남 교수가 발표한 101점에 청주박물관이 보관 중인 시대불명 활자 7점, 국립박물관 1점 등 총 109점으로 늘었다. 남 교수는 2010년 2점, 2012년 5점 등 3~4차례에 걸쳐 활자에 묻은 먹에 대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을 실시해 모두 12~13세기 먹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경북대의 연구용역에서 총 14점에 대해 1033~1155년이라는 시기를 재확인했다. 연구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서체와 크기 등을 종합해 볼 때 총 63점의 활자가 증도가자(탄소연대 측정 결과 12세기)이고, 46점은 다른 고려활자인 ‘네다리 활자’(13세기)다.
탄소연대 측정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이 기술은 유기물에만 적용할 수 있어 금속활자 자체의 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연구진은 무기물인 금속활자 대신 활자에 묻은 먹(유기물)으로 탄소연대를 측정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먹의 제작시기가 12세기라고 해서 활자의 제작시기까지 12세기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즉 먹은 12세기 것이 확실하지만 후대의 활자에 12세기의 먹을 묻혀놓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북대 산업협력단 측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맞서고 있다. 산업협력단의 한 연구원은 “활자와 먹이 묻어있는 부분의 훼손도를 분석한 결과 먹이 활자에 묻은 시기는 최소한 근대화 이전”이라며 “목판본의 먹을 떼서 활자에 붙이는 일은 현대기술로도 쉬운 작업이 아닌데,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 근대화 이전에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했다.
“마음 먹고 위조한다면 가능성 배제 못해”
탄소연대 측정 외에 서체와 주조방법 등도 증도가자가 금속활자의 역사를 100년 넘게 앞당겨야 한다는 데에 힘을 실어준다. 남 교수는 2010년 101점의 활자 중 12점을 분석한 결과 서체(구양순체)와 크기(가로 10~16㎜, 세로 10~14㎜)가 고려시대 선불교 해설서인 ‘남명화상찬송증도가’의 목판본(1239년)에 쓰인 글자체와 같고 주조방법이나 합금비율(구리 70~80%, 주석 15~20%, 납 1~15%)이 고려ㆍ조선시대 활자의 특성을 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증거들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모두 위조가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지학자는 “과학적 검증은 논리적 고리가 촘촘하게 연결돼 있어야 하는데 이번 연구의 경우 먹과 활자의 제작시기가 같다는 것을 입증할 마지막 한 개의 퍼즐이 부족하다”며 “예를 들어 누군가 의도적으로 목판본의 먹을 떼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활자에 붙였을 가능성 등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서체나 합금비율도 이런 식으로 위조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증도가자가 진품이라는 것을 확증하지 못한다.
활자 발굴된 경로도 불투명
결정적인 증거가 없을수록 활자가 발굴된 경로, 방증 사료 등이 중요하지만 이 역시 불투명하다. 총 109점의 활자 중 남 교수가 실물을 공개한 101점은 개인소장품이다. 김종춘 한국고미술협회장의 아내인 이씨의 소유다. 하지만 학계는 실제 소유주를 김 회장으로 보고 있고, 김 회장이 최근에도 도굴 문화재를 매입하고 감정가를 부풀린 혐의 등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는 점이 진위논란을 부추긴 불씨가 됐다.
김 회장 측이 문화재청에 제출한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서를 보면 이 활자들은 일제시대 때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돼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해방 후 대구에 사는 김모씨에게 전해졌다. 또 다른 김모씨에게 건네진 활자를 김 회장과 그의 처남이 사들였다.
문화재청은 김 회장의 신청서를 토대로 활자의 유입경로를 역추적해 그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정확한 추적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 또 최초 출토지인 만월대에서 누가 어떤 방법으로 활자를 빼냈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더욱이 출토시기가 일제시대여서 당시 출토된 유물들처럼 도굴품일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국가가 나서 도굴여부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윤순호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은 “과거처럼 유물이라고 무조건 문화재로 지정하기는 힘든 상황”이라며 “도굴품을 지정문화재로 지정할 경우 국제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증도가자로 인쇄한 금속활자본이 없다는 점도 결정적 한계다. 직지처럼 금속활자로 찍은 인쇄본(주자본)이 존재한다면 활자를 진짜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지만 증도가자의 경우 아직 주자본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검증 연구 하고도 논란 이어져
경북대 산학협력단의 연구가 증도가자 진위 논란에 대한 검증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활자를 대중에 처음 공개한 당사자가 연구책임자를 맡았다는 점도 논란을 부추겼다. 학계에서는 유물이 진짜라고 확신하는 남 교수에게 다시 검증을 맡긴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남 교수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연구팀이 꾸려질 당시 한국서지학회에 고사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며 “그런데도 서지학회가 ‘기존 연구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활자에 대한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며 연구 총괄을 요청해 울며 겨자 먹기로 연구책임자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탄소연대 측정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성분분석은 공주대, 서체 분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맡아 연구를 진행했다”며 “연구책임자로서 내가 한 일은 각각의 연구결과를 종합한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구용역을 발주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강순형 소장은 “당시 입찰에 경북대 산학협력단 외에 한 팀이 더 참여했는데, 그 팀은 활자 연구실적이 전무했다”고 설명했다. 남 교수만큼 활자 연구에 정통한 학자가 없다는 점이 현실적 한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객관적 검증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결국 공은 다시 정부에 넘겨졌다. 문화재청은 현 문화재위원들의 임기가 끝나는 4월 이후 문화재 지정 조사단을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조사단은 최소 3명에서 최대 두 자릿수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전문성과 객관성을 갖춘 조사단 선정, 지금까지 나온 쟁점들을 검증할 조사방법 도입 등이 없다면 논란은 종식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지정 조사에 과학자들을 포함시켜 무기물 연대 측정을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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