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동물연구센터 잇달아 개원
SARS 등 위험 질병 백신 개발
대형 국책과제 수주도 속속
석ㆍ박사 1만8500명 연구 지원
의대에 부는 변화 바람/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하
의대가 달라지고 있다. 예비의사 양성소의 단순한 역할에서 탈피, 첨단 의과학 연구의 중심으로 변신하고 있다. 임상과 기초과학 연구 역량을 겸비한 의과학 인재가 힘의 바탕이다. 동물실험실 등 첨단 연구 인프라는 비상을 위한 날개다. 고려 의대의 변신 노력을 살펴본다.
1895년 독일 물리학자 뢴트겐(1845~1923)의 X선 발견은 20세기 가장 빛나는 발견으로 손꼽힌다. 뢴트겐은 특허를 걸지 않았다. 그의 위대함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그는 “X선은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므로 모든 인류의 것”이라며 제안을 뿌리쳤다. 그가 처음 발견한 X선은 현재 질병 진단에서 공항 검색, 예술품 감식, 건물 비파괴 검사 등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하나의 기초과학 기술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실례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의과학 연구의 글로벌 중심으로 도약하기 위해 올인 중이다. 기초와 임상 연구에 두루 정통한 임상의과학자 양성에 눈 돌리는가 하면, 연구 인프라 확충에 아낌없이 돈을 쏟고 있다. 한국에서 제2,제3의 뢴트겐 신화를 쓰기 위한 노력이다.
이 대학은 최근 3년 새 첨단 교육 인프라인 본관, 문숙의학관 완공에 433억 원의 돈을 퍼부었다. 정작 관심을 끄는 쪽은 연구 인프라 투자다. 첨단 연구시설인 실험동물연구센터, BSL-3, ABSL-3가 최근 잇따라 문 열었거나 머잖아 문 열 예정이다. 고대 의대가 연구역량 강화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는 뭘까.
김효명 고대 의대 학장은 “연구에 집중하지 않으면 세계 명문으로 발돋움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 학장은 “고대가 최근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선전하면서 150위권에 진입했다. 2020년까지 50~100위권에 들겠다”며 “대학 명성은 연구역량에 달렸다”고 했다. QS랭킹 등 세계 대학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교수들이 내는 논문의 수준과 피인용 횟수다.
이 학교 유임주 연구교류부학장은 글로벌 연구중심대학 도약을 위해서는 ‘연구중심 경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구에도 경영 마인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다. 교수들의 연구 역량을 제대로 평가해 잘하는 이들에겐 격려를, 성과가 뒤지는 이들에겐 더 잘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하는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 부학장은 “아시아 맹주를 자처하는 한국 축구는 월드컵에선 맥을 못 춘다. 월드컵 진출을 넘어 16강 이상 오르는 데는 뭔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라고 빗댔다. 미 국립보건원(NIH)의 리서치 사이언티스트 시스템이 본보기다. NIH는 각 분야 연구자들에게 연구 전담 과학자(리서치 사이언티스트)를 딸려 주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 연구의 질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고대 의대의 본관 1층. 2013년 이곳에 실험동물연구센터가 문 열었다. 형질전환동물 관리, 수정란 제공 등 각종 동물실험을 위한 연구 공간이다. 생물안전 3등급(Biosafety Level 3)의 첨단 연구시설인 BSL-3도 마련됐다.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SARS 등 제3위험군에 속하는 병원체 취급과 이들 병원체의 유전자를 이용한 유전자 재조합 실험 등이 가능한 시설이다. 현재 이곳에선 각종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예방백신과 치료제, 진단제 개발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산학협동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고대 의대는 제3위험군의 병원체에 대한 동물실험까지 수행할 수 있는 동물이용생물안전 3등급(ABSL-3ㆍAnimal Biosafety Level 3)의 연구시설도 머잖아 선보일 계획이다.
연구 분야에 대한 공격적 투자는 대형 국책과제 수주로 이어지고 있다. BK21에 이은 BK21플러스 사업과 보건복지부ㆍ산업통상자원부의 대형 국책과제 수주가 대표적이다. 앞서 BK21 1,2단계 사업에는 총 216명의 교수가 참여해 4,500편의 논문을 발표, 국내 의과학 연구 환경을 크게 개선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지는 3단계(BK21플러스) 사업에는 해마다 2,500억원의 거액이 투입된다. ▦창의적 융합중개 의과학 연구인재 양성 ▦글로벌 연구중심대학 육성 등이 목표로, 석ㆍ박사급 전문가 1만8,500명을 지원하게 된다.
안암병원은 복지부 연구중심병원 육성 과제에 선정돼 9년간 약 185억원을 지원 받는다. 임상에서의 아이디어를 최종적으로 산업화로 연결하는 개방형 플랫폼 구축이 목표. 연구 성과로 창출된 수익은 연구에 재투자, 연구중심병원의 자립화를 모색하게 된다.
산업통상자원부과의 ‘병원-기업 상시 연계형 의료기기 플랫폼’ 사업에는 50여억원의 연구비가 투입된다. 의료기술 육성과 이의 산업화를 위해 병원과 업체들이 손을 맞잡는 것이다. 병원이 의료산업화의 첨병이 돼 미래 성장동력을 개발하는 중책을 떠맡게 되는 셈. 유 부학장은 “탐침으로 절개 없이 디스크를 고치는 비침습 척추 수술 기법, 암 치료를 위한 맞춤형 유전체 기술, 한국형 인공장기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 뇌와 신경을 연결해 의족ㆍ의수를 개발하거나 외부 사물을 움직이는 연구 등을 진행 중인 교수들이 연구비를 지원 받기 위해 뜨거운 내부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신약개발을 위한 글로벌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안암병원은 2012년 국내 유수의 의료기관들과 함께 보건산업진흥원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의 임상시험글로벌센터로 지정, 4년6개월 동안 모두 54억원의 연구비를 지원 받는다.
고대 의대에는 ‘임상의과학자 양성’이란 독특한 프로그램 있다. 전문의 자격 딴 뒤 기초의학교실에서 박사과정 밟는 전문 연구요원 양성 코스다. 등록금 전액 지원 등 학생당 1억 이상의 거금이 투입되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보통 의사의 길을 걷는 의대생들은 졸업 후 레지던트, 펠로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대학원 다니면서 박사를 딴다. 박사 학위에 걸맞는 제대된 된 지식과 실력을 갖추기에는 빡빡한 일정이다. 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5년 동안 실험실에서 풀타임 과학자로 연구에만 전념하게 된다. 임상과 기초과학 연구에 두루 능통한 핵심 중개연구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연구 역량을 끌어 올리려는 대학 측의 의지는 교내 리서치 페스티벌 개최로도 이어졌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이 페스티벌에는 의대는 물론 보건과학대, 생명과학대, 공대, 이과대 등 범자연계 교수들이 두루 참여해 특정 연구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며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송강섭기자 ericsong@hk.co.kr
▶연구의 뉴딜정책 절실...해외 한국인 인재들도 불러들여야
유임주 고대 의대 연구교류부학장은 “우리나라에서 연구의 뉴딜정책이 절실하다”고 했다. 연구역량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해외에서 실력을 다진 한국인 인재들을 불러 모을 혁신적 전략이 필요한데, 이들이 국내 대학에 들어오고 싶어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유 부학장은 “생명과학 등 전공자로 박사후 과정(포스닥)에 있는 이들이 아주 많다”며 “정부가 이들에 대한 지원책 마련해 국내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각종 연구 투자를 통해 뽑아낸 결과물은 신통찮다. 정부에서도, 삼성그룹 등 민간에서도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부실한 연구 성과는 국내 교수 시장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이 한 원인이라는 게 유 부학장의 분석. 의과학 선진국인 미국은 그렇지 않단다. 예컨대 A대학에서 연구하다 성과가 안 나 잘리면 얼마든지 B대학, C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연구 풍토도 사뭇 다르다. 이는 시장 규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분석. 유 부학장은 “연구 자리가 많은 미국에서는 대학 교수하다가 포스닥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거 쪽팔리다고 생각도 안 한다. 연구비도 못 받고 논문도 안 나오니까 일단 한 걸음 물러나 남 밑에서 일할 준비도 돼 있다”고 했다. 유 부학장은 “우린 깨지면 끝이다. 패자부활전이 없다”고 했다.
임상 연구 쪽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병원들이 속속 덩치를 키우면서 교수 수용 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것. 유 부학장은 “의사 교수는 종종 뽑는다. 그러나 순수과학자 뽑을 자리 몇 개나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유 부학장은 “교수와 박사 사이의 중간 단계의 자리를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가 지원 박사제도의 도입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연구에 투자하는 낭비 아니다. 복지다”라며 “연구비 아끼는 건 바보짓”이라 했다.
송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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