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4년이 정규 교육의 전부
가수·배우·시인으로 유명
1981년 돌연 은퇴 20년간 칩거
로드 맥퀸의 노래는 혼자 들을 때 가장 좋다. 맨발로 느끼는 흙 길 같은 음색. 패인 곳 없이 편평하지만 거칠거칠한 바닥의 질감으로 그는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한 곡만 듣고 말기 힘들다. 한 곡 또 한 곡 연이어 찾아 듣게 되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매력. 그렇게 듣다 보면, 예컨대 ‘If you go away’나 ‘Long long time’ 같은 노래들을 듣다 보면 하릴없이 옛 생각에 젖어 들고, 허전한 곁을 느끼게도 된다. 그가 지은 수많은 노랫말들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아니면 은유적으로라도 떠오르는 단어들, 사랑(love) 시간(time) 기억(remember) 꿈(dream)같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한 말들의 통속적 힘, 진부하지만 끈질긴 일상의 서정이 그 매력의 비밀일지 모른다.
그가 노래하는 일상은 대체로 표백된 일상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서글픔도, ‘먹고 사는’시간의 고달픔도 치사스러움도 거기에는 없다. 그의 일상은 또 세상으로부터 담을 두른 지극히 사적인 일상이었다. 그의 포크 가요들이 만들어지고 불리어진 60~70년대와 이후 미국 사회의 크고 작은 바람들, 이를테면 존 바에즈나 밥 딜런이 노래한 현실과 이상을, 그의 노래와 시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는 50~60년대 비트 세대와 68세대의 전위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현실도피적이라고 비난 받았고, 문단의 비평가들로부터는 “마시멜로 시인”혹은 ‘키치의 제왕(King of Kitche)이라 조롱 당했다.
하지만 당대와 이후 세대의 수많은 대중들은 그의 노래와 시를 사랑했다. 그는 포크 컨트리 스탠다드 팝 등 대중가요서부터 영화음악 클래식 협주곡과 교향곡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1,500여 곡을 작곡했고,50여 개의 음반을 냈다. 30여 권의 시집과 다수의 노래집, 산문집도 출간했다. 그는 동시대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 받은 시인이었다. 66년 자비로 출판한 시집 와 이듬해 랜덤하우스에서 낸 은 무려 4,000만부가 팔렸다. 대중들은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불렀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비공인 계관시인’이라 했다. 로드니 마빈 맥퀸(Rodney Marvin Mckeunㆍ애칭 로드 맥퀸)이 1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로드 맥퀸은 1933년 4월 29일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와 양부 손에 길러졌다. 자신의 홈페이지(Rodmckeun.com)에 올린 ‘Lonesome Cities’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 의붓아버지는 언덕을 깎아 고속도로를 내는 트랙터 운전기사(cat skinner)였다. 우리 가족은 늘 함께 다녔는데,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레건 포틀랜드, 워싱턴 스케마니아, 텍사스 알라모, 네바다…. 그가 일하러 가고 없을 땐 엄마와 나는 낡은 시보레 안에서 지냈고, 대개는 고속도로를 따라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돌곤 했다.” 양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툭하면 그를 학대했다고 한다. “그는 술을 무척 많이 마셨고, 취하면 나를 펀치백처럼 두드려 패곤 했다. 그래서 도망쳤다.”그게 11살 때였다. 신문 배달부, 목장 잡역부, 술집 심부름꾼…. 돈을 벌었다기보다 밥과 잠자리를 벌었다고 해야 할 그 험한 노동으로 그는 돈을 모아 어머니에게 보내곤 했다. 어머니가 고향 오클랜드에 다시 정착한 뒤 그는 돌아와 학교를 다녔지만, 그 잠깐(초등 4년)이 그가 평생 동안 받은 정규 교육의 전부였다.
15살 무렵 그는 오클랜드 베이에어리어의 라디오 방송(KROW) 디스크자키였다. “나는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마이크 앞에 조용히 앉아 말하곤 했다. 꽤 인기도 있었다.”그의 음성은 물론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지만, 젖먹이 시절서부터 의붓아버지의 트럭 안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며 들었을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그의 밑천이었을 것이다. 10대의 그에게 음악은 곧 세계였다. 집에 머물 때든 바깥을 떠돌 때든 그는 늘 일을 했다. 벌목공, 도로공사 잡역부, 로데오 카우보이, 스턴트맨….
스무 살 무렵이던 50년대 초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다. 54년 첫 시집 을 낸 걸 보면 그가 시를 쓴 건 훨씬 전부터였을 테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눈에 띄는 다양한 잡지와 책을 틈만 나면 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래도 짓고 불렀다. 방송국에서 알게 된 필리스 딜러(배우 겸 코미디언, 1917~2012)의 소개로 당시 캘리포니아 노스비치의 인기 클럽 ‘Pulple Onion’무대에도 섰다. 거기서 그는 빔보, 자니 매티스, 윌리엄 브라더스, 앤디 윌리엄스 등 당대의 스타들을 만났고,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라이어넬 햄프턴 밴드에 들어 6개월간 미국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노래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밴드의 유일한 백인이 자신이었노라고 자랑스러워했다.
50년대 말 그는 첫 앨범 DECCA레코드에서 몇 장의 앨범을 냈고, ‘Summer Love’(58년)등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몇 편의 영화에 배우로도 출연했다. 그는 목소리뿐 아니라 외모도 웬만한 배우 못지 않게 끌밋했고, 특히 눈빛에 깃든 우수는 연기력에 상관없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60년대의 그는 이미 유명한 시인이었다. 클럽과 재즈 바 같은 데서 노래하는 사이사이 그는 자신의 시를, 때로는 잭 케루악이나 앨런 긴즈버그와 나란히 앉아, 낭송하곤 했다고 한다. 66년 자비로 출판한 두 번째 시집 …이 불티나게 팔리자 랜덤하우스에서 부리나케 달려와 계약을 제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곡이 수록된 자신과 다른 가수들의 음반 판매량은 최소 1억 장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페리 코모, 앤디 윌리엄스, 프랭크 시내트라, 마돈나…, 재즈 싱어 쳇 베이커, 보스턴팝스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프랭크 시내트라의 ‘The Words and Music of Rod Mukuen’은 맥퀸의 노래로만 만들어진 앨범이다.
맥퀸의 팬들은 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부른 노래와 함께 맥퀸의 오리지널 버전을 비교하며 듣곤 했는데, 가령 프랭크 시내트라나 자니 캐쉬의 ‘Love’s been Good to Me’를 들으며 혹은 페리 코모의 ‘I think of you’을 두고, 맥퀸 버전과 어떤 게 더 나은지 투닥거리곤 했다.
그는 자작시 낭송 앨범 ‘Lonesome Cities’로 68년 그래미 ‘Best Spoken Word Recording’상을 받았다. 영화 ‘The Prime of Miss Jean Brodie’와 ‘A Boy Named Charlie Brown’의 음악으로 두 차례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 올랐고, ‘The City: A suite for narrator & orchestra’로 음악부문 퓰리처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영국 배우 매기 스미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1969년 영화 ‘The prime of Miss Jean Brodie’의 주제곡으로 쓰인 ‘Jean’은, 한국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의 노래 가운데 하나다.
그의 음악적 삶에서 벨기에 출신의 샹송 가수겸 작곡가 자크 브렐(Jacques Brel, 1929~78)과의 인연을 빼놓을 순 없다. 맥퀸 덕에 브렐이 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가수로서 맥퀸의 생명력 역시 브렐에게 크게 빚졌기 때문이다. 6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 머물 무렵 브렐을 만난 맥퀸은 당시 큰 빛을 못 보던 브렐의 샹송 ‘Ne me quitte pas’를 번안, ‘If you go away’라는 제목으로 취입해 불후의 명곡으로 만들어냈다. 혹자는 스탠더드 팝의 한 정점이라 칭송하는 이 노래는 이후 프랭크 시내트라, 닐 다이아몬드, 파트리샤 카스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끊임없이 불렸고 수많은 언어로도 번안됐는데, 맥퀸에 따르면 지금까지 레코딩된 횟수만 1,000번이 넘는다고 한다. 브렐의 곡 ‘Le Moribond’를 번안한 곡 ‘Seasons In the Sun’도 있다. 캐나다 출신 가수 겸 작곡가 테리 잭스(Terry Jacks)는 이 노래를 리바이블해 74년 3월 한달 내내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99년 팝 밴드 웨스트라이프도 편곡해 불렀다.
시와 노래, 그리고 공연과 방송으로 쉴 틈 없이 바쁘던 로드 맥퀸은 1981년 돌연 은퇴한다. 그 해 그는 만성우울증 진단을 받는다. 은퇴 이후 병을 얻었는지, 병 때문에 은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우울증의 원인은 벼락 출세와 현기증 나는 인기, 더불어 얻게 된 엄청난 부와 고독 탓도 있겠지만, 그의 시에 대한 평단의 거친 조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촌스러운 운율의 60년대 기성복 같은 시” “달콤한 키치” “피상적이고 따분하고 심지어 어리석은 시들” 퓰리처상 수상자인 미국의 계관 시인 칼 샤피로는 “맥퀸을 시인이라 부르는 것조차 부적절하다”고 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그의 칩거는 약 20년간 이어졌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캘리포니아 비벌리힐스의 400평짜리 맨션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개 한 마리, 그리고 “100만 장이 넘는”(SFC,02.12.21) 음반과 CD에 파묻혀 사실상 은둔했다. 그가 대중 앞에 다시 서기 직전인 2001년, 73세의 그를 인터뷰한 대중문화 비평가 줄리아 켈러는 시카고트리뷴 기사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했다. “당신이 맥퀸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아마 당신이 너무 늦게, 이를테면 70년대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미국 중산층 가정의 풍경을 SFC의 대중문화평론가 제임스 설리번은 “소파 곁 탁자에는 그의 시집이 있고, 하이파이에서는 그의 달콤한 노래나 낭송시가 흘러나오고 있고, TV를 켜면 ‘투나잇 쇼’에 출연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쓸 정도였다. 은퇴 이유에 대해 그는 “피곤했다. 정점에서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1년에 공연을 280번 한 적도 있다. 한 도시에서 공연한 뒤 (비행기에서) 잠들어 다른 도시에서 깨어나는 식이었다.”70대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지친 듯, 더 거칠어졌다고 켈러는 썼는데, 공연장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그의 노래를 들은 올드 팬들은 노년의 음색이 더 낫다고도 했다. 그는 숨질 때까지 시를 썼고, 두 권의 시집을 더 냈지만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그 시들과 함께 미발표시들을 올리곤 했다.
뉴욕타임스는 부고기사에서 그의 음악과 시가 비트세대에서 뉴에이지 세대를 이어준 가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전쟁과 암살과 폭동의 시대에 위안을 얻고자 했던 이들의 마음을 그가 사로잡았다는 거였다. 그 평가는 맥퀸의 자평이기도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받은 사랑은 세상의 광기에 대한 반작용 같은 거였다. (…) 시시하고 진부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게 진실이다. 그럼 된 거 아닌가.” 평단의 폄하에 대해서도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기 전에는 뉴스위크든 타임이든 뭐든, 서평은 늘 열광적이었다(always raves)”고 말했다. 순진한 서정의 시대가 그와 함께 영원히 스러졌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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