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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에 누구를 모시나… 임금과 지식인 집단 힘 겨루기

입력
2015.02.1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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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자 15명 종사 과정… 당대 정치역학따라 결정

이황 첫 청원후 41년 만에

고려 충신 정몽주 배향은

중종 반정 이끈 조광조 등 작품

왕권 견제 주장 정도전 빠져

조선의 지식 계보학 최연식 지음 옥당 발행ㆍ336쪽ㆍ1만 6,000원
조선의 지식 계보학 최연식 지음 옥당 발행ㆍ336쪽ㆍ1만 6,000원

조선은 공자를 받드는 유교의 나라이자 지식인의 나라였다. 건국 이듬해에 문묘 즉 공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그 6년 뒤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열어 유생을 길러 냈다. 지금의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 안에 있는 성균관 대성전(사적 143호)이 조선의 문묘다. 문묘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의 유교 성현 위패를 모신 신성한 공간이다. 여기에 모셔진 조선 지식인은 정몽주를 포함해 15명이다.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향까지 합쳐 동국 18현을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들과 나란히 배향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몽주가 왜 포함됐을까. 그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조선을 거부하다 선죽교에서 테러를 당해 순절한 이가 아닌가. 정도전이 빠진 것도 이상하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지식인의 나라로 설계한 주인공으로서 누구보다 먼저 문묘에 들어가야 할 인물이 왜 빠졌을까.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 안에 있는 문묘 대성전(사적 145호). 유교의 나라, 조선은 이곳에 신라ㆍ고려ㆍ조선의 동국 명현 18현위를 배향해 지식인의 표상으로 삼았다. 옥당출판사 제공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 안에 있는 문묘 대성전(사적 145호). 유교의 나라, 조선은 이곳에 신라ㆍ고려ㆍ조선의 동국 명현 18현위를 배향해 지식인의 표상으로 삼았다. 옥당출판사 제공

최연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쓴 ‘조선 지식의 계보학‘에서 그 곡절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문묘는 학식과 덕망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묘에 누구를 모시느냐는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힘 겨루기, 사림 내부의 분열과 당색 등 당대의 정치역학이 결정했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기둥, 이황과 이이가 문묘 종사를 받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이 또한 오랜 세월에 걸친 격렬한 논쟁 끝에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퇴계 이황만 해도 선조가 즉위하자마자 영남 사림에서 줄기차게 문묘 종사를 요구했지만, 첫 청원 후 41년 만인 광해군 2년에야 문묘에 배향됐다.

이 책은 조선 지식인 15명이 문묘에 종사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나라, 조선의 성쇠를 지식계보학의 관점에서 서술했다. 문묘 종사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그것이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은 누구다“라고 알리는 국가 공인 절차였기 때문이다. 왕실의 계보는 임금의 위패를 종묘에 모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공인했듯이, 지식인의 계보는 그들의 위패를 문묘에 안치함으로써 국가가 공인했다. 이는 정통성 문제와 직결된 것이어서 문묘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지식권력의 향방이 바뀌며 그때그때 왕권과 길항했다. 왕과 사림은 서로 견제하는 장치로 문묘 종사를 이용했다. 결정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지만 조선 최초로 문묘에 배향됐다. ⓒ권태균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지만 조선 최초로 문묘에 배향됐다. ⓒ권태균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사후 125년 만에 조선 지식인의 표상으로 문묘에 배향된 것은 중종 반정 덕분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끝장낸 반정 이후 정치 전면에 등장한 조광조 등 젊은 지식인들은 사화로 희생된 자신들의 스승을 문묘에 배향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표상을 삼고자 했다. 명분을 세우자니 뿌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적격자가 없었다. 해서 생각해 낸 것이 정몽주다. 부당한 권력에 맞선 정의로운 지식인의 상징으로 정몽주를 내세우고, 그의 학통이 김숙자-김종직-김굉필을 거쳐 조광조에게 이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조광조가 실제로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기간은 2년 정도밖에 안 된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으로서는 손해볼 게 없었다. 반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한 지식인이지만 문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권오창
삼봉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한 지식인이지만 문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권오창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정도전이 문묘 종사에 빠진 것은 정치적 패배에 따른 결과다. 그가 설계하고 꿈꾼 조선은 왕이 전횡할 수 없는 나라, 재상과 지식인들이 왕을 견제하는 나라였다. 왕자의 난까지 일으켜서 즉위한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태조는 정도전을 죽였다. 정치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정도전은 지식인이라는 타이틀도 뺏겼다. 정도전의 복권과 명예 회복은 조선이 다 끝나갈 무렵인 고종 때 와서야 이뤄졌다.

조선 지식인과 조선 지성사에 관한 책은 많지만 문묘 종사를 통해 지식계보학을 그려 보이는 책은 거의 처음이라 반갑다. 저자는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연세대 국학연구원 부원장과 동아시아고전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2003년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검토하는 논문을 쓰다가 문묘 종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조선 최초의 인물이고, 조광조가 이를 주도했으며, 정몽주로 시작하는 조선 성리학의 계보가 학문적 기원보다는 정치 투쟁의 산물임을 확인했다. 그 뒤 2011년 문묘 종사의 정치동학을 계보학적 관점에서 개괄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 책의 얼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문묘에 배향할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정치의 적나라한 속살이다. 예컨대 율곡 이이의 문묘 종사는 처음 거론된 지 71년 만인 숙종 20년(1694), 승인-취소-재승인을 거쳐 최종 확정됐다. 천하의 율곡이 문묘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가는 수모를 겪은 데는 환국, 다시 말해 친위 쿠데타를 세 차례나 일으켜 지식인 집단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노련한 정치 전략이 작동했다. 숙종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남인으로 지식권력의 향배를 뒤집는 환국을 단행했고, 율곡의 문묘 종사는 그때마다 출렁댄 것이다. 국왕이 주도한 이 환국 정치 이후 독립성을 잃고 분열을 거듭하던 조선의 지식권력은 효종 연간에 벌어진 두 차례 예송 논쟁으로 노론의 권력 독주가 시작되면서 동력을 거의 상실했다. 지식권력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그 뒤 조선이 어떻게 기울었는지는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이 흥미진진한 책은 그저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이며, 대한민국 지식계보학은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권력과 지식의 팽팽한 대결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래에도 계속될 현재진행형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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