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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의 향연에 취하다보면 수천 가지 삶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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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의 향연에 취하다보면 수천 가지 삶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입력
2015.02.1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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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여전히 음반을 사서 음악을 듣는다. 모 대기업의 무료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광고 문구인 ‘넌 아직도 돈 내고 노래 듣니?’에서 ‘너’가 바로 나다. 나이가 들어도 이 취미는 변함이 없다. 중고 음반가게를 뒤적일 땐 시간의 블랙홀에 들어간 것처럼 무아지경에 빠지고 최면에 빠진 상태로 신용카드를 긁는다.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중증인 환자들이 무더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보면 내가 정상인처럼 느껴져 안심이 된다. 영국 작가 닉 혼비의 소설 ‘하이 피델리티’를 극화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챔피언십 바이닐’을 운영하는 30대 노총각 롭 고든(존 큐잭)이다. 여자친구 로라(이븐 야일리)에게 차인 롭은 신세한탄을 하며 옛 여자친구들에게 왜 버림 받았나 곰곰이 되돌아본다.

로맨틱 코미디의 명작으로 종종 꼽히는 영화지만 내겐 롭의 연애사보다 챔피언십 바이닐에서 일하는 세 음악광 얼간이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역대 실연 톱5’ ‘A면 1번 곡이 좋은 앨범 톱5’ 등 순위 꼽는 게 취미인 주인공 롭, 스티비 원더의 ‘아이 저스트 콜드 투 세이 아임 소리’를 찾는 중년 남자를 쫓아내며 “스티비 원더가 1980, 90년대 저지른 음악적 범죄 톱5” 운운하는 수다쟁이 배리(잭 블랙), 수줍고 소심한 대머리 총각 딕(토드 루이소). 서로 다른 외모에 성격도 다른 것 같지만 세 인물은 마치 한 캐릭터를 셋으로 쪼개놓은 것처럼 닮았다.

음악광들에게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명절상 같은 영화다. 상다리가 휠 만큼 진수성찬의 음악이 나온다. 카메오로 출연한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비롯해 밥 딜런, 벨벳 언더그라운드, 드 라 솔, 스테레오랩, 베타 밴드, 러브, 스티비 원더 등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명곡이 쏟아진다. 60곡 가까이 흐르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마다 귀에 꽂히는 곡도 다르다.

여기엔 눈에 띄는 조연 배우 한 명이 나온다. 가수 마리 드 살 역의 리사 보넷으로 1980년대 인기 시트콤 ‘코스비 가족’에서 둘째 딸 데니스를 연기했던 배우다. 가수 레니 크래비츠가 무명시절이었을 때 만나 결혼했다가 5년 만에 이혼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크래비츠는 보넷과 한창 갈등을 겪을 때 이를 소재로 명곡 ‘잇 에인트 오버 틸 이츠 오버’를 발표해 스타덤에 올랐고 보넷은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보넷은 영화에서 영국 가수 피터 프램튼의 명곡 ‘베이비 아이 러브 유어 웨이’(1975)를 노래한다. 롭에게 마리는 신기루 같은 판타지다. “항상 저 노래를 싫어했어”라고 말하던 롭이 갑자기 이 노래가 좋아졌고 하는 건 판타지에 넘어가서다. 마리와 로맨틱하고 성공적인 밤을 보내지만 롭은 결국 판타지 대신 현실을 택한다.

‘베이비 아이 러브 유어 웨이’가 유독 인상에 남는 건 한창 LP를 사들이기 시작했던 1980년대 후반의 한 순간이 떠올라서다. 내게 그렇듯 롭에게도 벽장 가득 꼽힌 음반은 삶의 오롯한 흔적이다. 오죽하면 알파벳이나 발매 순도 아니고 개인적인 추억의 순서대로 수천 장의 음반을 정리하겠다고 생각할까. 여자친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곡으로 믹스 테이프를 만드는 롭처럼 내가 1988년을 기억하는 테이프를 만든다면 아마 이 곡이 들어갈 것 같다(원곡 대신 혼성 듀어 ‘윌 투 파워’가 그 해 리메이크해 발표한 곡으로). 집안 가득 쌓인 음반들을 두고도 계속 앨범을 사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싶다. 음반이 아니라 삶의 흔적을 듣는다는 것. ‘호갱님’이라 불린다 해도 역시 음악은 음반을 사서 손때 묻히며 들어야 제맛인 법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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