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국 빈곤층 위해… 맞춤형 값싼 기술 세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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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국 빈곤층 위해… 맞춤형 값싼 기술 세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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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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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슈마허의 중간기술서 시작, 빈곤 해결하는 기술 개발에 주력

저개발·개도국 지역 문제 해결, 필리핀 페트병 전구 14만 가구 혜택

자선사업 한계를 넘다, 휴대 정수기 '라이프스트로' 보편화

물이 부족한 땅에서 발로 밟아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농업용 페달펌프. 출처 외신종합·베스티가드 프란센 홈페이지.

동아프리카 지역 여성들에게 월경의 의미는 ‘불편함’이나 ‘고통’보다 ‘배고픔’에 더 가깝다. 생리대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생리대는 85센트로 이 지역 하루 평균 수입 1.27달러와 비슷하다. 생리 기간에 슈퍼마켓과 약국에 가서 생리대와 진통제를 사는 여성들의 모습은 동아프리카 지역에선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들은 생리대와 가족의 저녁식사를 두고 무엇을 선택할 지 고민한다.

동아프리카 여성들은 그래서 생리대 대신 신문, 넝마, 면, 매트리스 조각이나 심지어 진흙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용품들은 불편한데다 감염 위험성이 크다. 캐나다 여성단체인 팜므 인터내셔널은 이를 막기 위한 여성 건강 관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동아프리카에 생리대의 일종인 생리컵을 나눠주고 있다고 허핑턴포스트 캐나다가 최근 전했다.

동아프리카 여성들이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반영구 생리컵. 출처 외신종합·베스티가드 프란센 홈페이지.

인간의 얼굴을 한 ‘적정기술’

삽입형 생리대의 일종인 생리컵은 일회용 생리대에 비해 경제적이고 또 다른 삽입형 생리대인 탐폰보다 안전하다. 우선 생리컵은 최대 12시간 동안 쓸 수 있고 10년 동안 재사용이 가능한 반영구 제품이다. 또 표백제를 사용해 심각한 부작용을 부를 수 있는 탐폰과 달리 생리컵은 의료용 실리콘 재질이라 안심하고 쓸 수 있다. 삽입형 생리대의 특성상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 운동 같은 외부 활동을 하는데 불편이 덜하다는 장점도 있어 생리대가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훌륭한 대안이라는 평가다. 케냐 소녀들은 생리 기간 평균 5일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다. 더 편리하고 친환경적인 생리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 탄생한 생리컵이 저개발국 여성들의 건강은 물론 교육권까지 보장하게 된 것이다.

동아프리카에 보급된 생리컵 같은 것을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라고 부른다.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맞춤 기술이라는 의미다. 이 기술들은 물, 전기 또는 기본 물자가 부족한 곳에 주로 적용된다. 공기에서 물을 뽑아내는 기계, 물이 필요 없는 화장실 등 최근 개발이 활발한 물 부족 대안기술들이 대표적이다.

적정기술의 개념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에서 시작됐다. 슈마허는 소규모 자본, 간단한 기술을 바탕으로 지역 주민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고 자립을 돕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1966년 중간기술개발집단(ITDG)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첨단기술, 자본집약적 기술과 대비되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이후 중간기술이라는 용어가 자칫 미완 혹은 열등의 뜻으로 읽힐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적정기술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대안기술, 착한기술로 부르기도 한다.

소아정신과 의사였던 폴 폴락도 적정기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폴락은 “전문가의 90%가 부유한 10%를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을 소외된 90%를 위해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국제개발기업(IDE)을 세워 적정기술의 사업화에 힘썼다.

물을 채운 페트병과 표백제만으로 전기 없이 빛을 밝히는 페트병 전구. 출처 외신종합·베스티가드 프란센 홈페이지.

물과 표백제로 불 밝히는 ‘모저 램프’

브라질 기계공 알프레도 모저의 ‘페트병 전구’도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적정기술이다. 모저 램프라고도 불리는 페트병 전구는 물을 채운 플라스틱 병과 약간의 표백제로 전기 없이도 빛을 밝힐 수 있다. 지붕에 구멍을 뚫어 페트병을 그 자리에 넣으면 태양광의 정도에 따라 40~60와트 밝기로 빛난다.

모저가 이 천연 전구를 만든 계기는 2002년 그가 살던 브라질 남부 우베라바 지역에 발생한 잦은 정전 때문이었다. 모저와 친구들은 전기가 끊기자 한 데 모여 만약 비상 상황이 생기면 외부에 이를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궁리했다. 그 때 그의 상사 한 명이 페트병에 물을 채우고 마른 풀 밭에 놓은 후 태양광선으로 화재를 일으켜 구조대에 알리자는 제안을 했다. 페트병에 물을 받아 굴절되는 빛을 이용한다는 아이디어는 페트병 전구의 영감이 됐다.

모저 램프의 빛은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대나무, 타이어 등 다양한 재료로 집을 짓는 필리핀 마이쉘터재단 설립자 일락 디아즈도 가세했다. 디아즈는 태양광 전구를 달아 밤에도 쓸 수 있도록 한 발 더 나아갔다.

모저 램프는 필리핀에서 유난히 인기다. 인구 4분의 1이 빈곤층이고 전기료가 비정상적으로 비싼 필리핀에서 페트병 전구는 14만가구에 빛을 선사했다. 일부는 이를 이용해 수경 재배도 하고 있다.

BBC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인도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아르헨티나 피지 등 약 15개 국가 100만가구에 페트병 전구가 보급됐다. 모저와 마이쉘터재단은 이 장치를 빈민가에 설치하는 ‘빛의 리터’ 운동을 함께 벌이고 있다. “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주었다”며 “그러니 빛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게 모저의 모토다.

오염된 물을 식수로 바꿔 주는 휴대용 정수기 라이프스트로. 출처 외신종합·베스티가드 프란센 홈페이지.

자선 아니라 목적 있는 이윤 추구

그렇다고 적정기술이 저개발국과 개도국에서만 통용되는 시혜적 자선사업은 아니다. 적정기술을 써서 이윤을 창출한 회사들은 적정기술이 얼마든지 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영국의 프랙티컬 액션(전 ITDG), 독일 국제협력단, 네덜란드 개발기관 등 선진국 원조기관ㆍ단체 외에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샥티, 라오스의 선라봅, 인도의 셀코 등 개도국의 사회적 기업들이 적정기술 개발에 뛰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적이 있는 이윤’을 슬로건으로 내건 다국적 사회적 기업인 베스터가드 프란센은 물건을 만들고 이를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일반 기업들과 똑같은 운영 방식을 갖고 있는 대표적 적정기술 회사다. 정부 지원금은 당연히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들의 제품 경쟁력으로 승부한다.

예를 들어‘라이프스트로’(lifestraw)는 적정기술로 디자인된 베스터가드 프란센의 독특한 빨대다. 라이프스트로는 필터를 통해 오염된 물에서 박테리아, 기생충 등을 걸러 식수로 바꿔주는 일종의 휴대용 정수기로 오지 탐험가나 여행가들에게 인기다. 가격이 3.5달러(약 3,800원)인 라이프스트로는 한 번 구입하면 최대 700리터의 물을 정수할 수 있고 통상 6개월~1년 사용이 가능하다. 아직도 6명 중 1명이 식수를 구하지 못하고 하루에 6,000명이 수인성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개도국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혁명적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호단체를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돼 글로벌 히트 상품이 됐고 이후에 모든 여행자의 필수 비상용품으로 자리잡았다.

폴락이 세운 IDE의 대표작인 페달펌프도 적정기술이 시혜적 모델로의 한계를 넘어 사업적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례다. 페달펌프는 물이 부족한 저개발국 빈농을 위해 발로 밟아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간편한 장치. IDE는 30년 전 방글라데시 농민들에게 단돈 25달러의 페달펌프를 150만대나 팔아 이윤을 남겼다. 하늘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던 농민들도 페달펌프를 구입하고 연간 소득이 100달러 이상 늘었다.

모기장에 말라리아 방지제와 살충제를 첨가한 말라리아용 모기장 퍼마넷. 출처 외신종합·베스티가드 프란센 홈페이지.

말라리아로부터 아이들 지키는 ‘퍼마넷’

베스터가드 프란센은 라이프스트로 외 또 다른 구호용품인 ‘퍼마넷’(permanet)을 개발했다. 기본 형태의 모기장에 말라리아 방지제에다 살충제를 첨가한 것으로, 모기로 인한 말라리아 감염을 막기 위해 마련된 강력하고 안전한 모기장이다. 가끔 세탁을 하더라도 3, 4년 살충 효과가 지속된다. 아프리카 대륙의 연간 말라리아 사망자 숫자가 100만명 이상을 웃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치를 값으로 매기기 어려운 물건이다. 세계보건기구(WHO)도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이 모기장 보급에 힘쓰고 있다. WHO는 퍼마넷 덕분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생존율이 30% 이상 늘어났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적정기술이 붐이다. 2000년대부터 나눔과 기술,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등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 생겨나고 비정부기구(NGO), 대학 내 기관 등에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급증하고 있다.

윤치영 대전대 생명과학부 교수(나눔과 기술 전 공동대표)는 “한국은 난로형 축열기인 ‘지-세이버’(G-saver), 망고 말리는 기술 등 2~3년 전부터 적정기술을 직접 개발해 몽골, 차드 같은 저개발국에 보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우리도 30년 동안 가난을 겪어 봐서 식수, 위생시스템, 단열재 등 가난한 곳에서 무엇이 필요한 지 잘 안다”며 “거대경제와 거대기업이 주도하는 화려한 기술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지역 주민들의 삶에 진짜로 필요한 기술이라는 게 적정기술의 가치”라고 말했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